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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윤철호] 정의는 짧고 처신은 길다



학내 집회도 허용되지 않던 대학시절 시위 대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다 최루탄이 터지고 어느 틈에 내 바로 앞에 전투경찰과 사복형사들을 마주하고는 도망가기 바빴던 기억이 몇 번 있다. 잡히면 강제휴학에 군대로 추방되던 시절이었으니 기겁을 하곤 했었는데 훗날 얘기하다 보면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그런 젊은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일들이 많다. 누구나 많은 사람들이 문제라고 느끼고 있고 자신도 느끼고 있는 사안들을 직면할 때가 있을 것이다. 사안의 내용이 뭔지 몰라서 듣고만 있다가 간신히 내용을 이해하고 나면 사람들이 나에게도 의견을 묻는다. 그러면 마지못해 한마디 하게 된다. 이러이러 한 거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의견인 거 같고 여러 사람이 자신보다 더 확신 있는 입장을 가진 것 같다. 그런가 보다. 다들 의견이 이러하니 그렇게 되겠지.

정작 문제는 대개 그 뒤에 생긴다. 나중에 지나고 보면 자신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남아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대개 입을 다물거나 입장을 바꿨다.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거지? 자신이라고 그 문제에 대해서 무슨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을 확 바꿀 수는 없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확 바꾸지 못하는 게 문제가 된다.

한때 쓸데없이 소신을 고집하다 불편해지는 패턴을 몇 차례 반복하고는 내가 왜 그런지 의아해한 적이 있었다. ‘어렸을 때 위인전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건가?’ 야단맞더라도 꿋꿋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던 어린 위인들?

많은 의견은 이해관계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 의견은 이 사람에게 유리하고 저 의견은 저 사람에게 유리하다. 유불리까지는 알 수가 없더라도 이 의견을 지지하는 것은 그 의견을 주장하는 김 선생을 지지하는 것이고 저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그 의견을 주장하는 박 선생을 편드는 것이다. 누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얼굴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법이니 그렇게 어려운 판단은 아니다.

대개의 일들은 무엇이 옳은지 알기 힘들고 입장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인다. 내용을 알아도 그 주장이 정의냐 진실이냐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알고 있던 김 선생, 이 사장과 다른 입장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과 불편한 관계에 서게 되는 게 바로 눈앞의 현실의 문제다. 지금 저 사람 편을 안 들어주면 인간관계가 불편해진다. 그게 보통사람들의 처신의 문제다.

처신은 상대적으로 쉬워 보인다. 일단 이 사람 저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균형을 잡는 일인데 잘 모르겠으면 적어도 척을 지지 않으면 되고 모나지 않으면 된다. 쉽게 가늠이 간다. 물론 국가차원이라든가 국제사회라든가 이런 식으로 넓어지면 처신의 문제,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정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인간관계의 좌표에서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잘못 푸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된다.

지금 무엇이 옳다고 해도 그 문제는 바로 지나가고 자주 얼굴을 마주쳐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는 평생 혹은 죽음 이후까지도 간다. 정의는 짧고 처신은 긴 것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대학교 강의에서 배운 지식에 의하면 유대교라는 민족종교는 유대민족이라는 인간관계를 넘어 지구인 모두에게 확장할 수 있는 메시지로 내용이 변화됐을 때 다양한 민족들을 모두 포용하는 인류전체의 구원의 메시지를 가진 보편종교로 성장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처신에 능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칭찬한다. 지혜롭다고. 그러나 우리는 지금 다소 서투르고 지혜롭지 못하더라도 정의로운 사람들을 조금 더 칭찬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사회 전체가 조금 더 전진하게 될 것이다.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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