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김명호 칼럼] 마키아벨리스트가 돼야 한다



미국은 유연성을 가미해 대북 정책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비핵화는 불변 목표지만 우리의 전략적 유연성 필요해졌다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국익이 뭔지 전략적 판단할 때 됐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장소가 하노이와 다낭의 줄다리기 속에서 북한 요구대로 하노이로 결정됐다. 당초 대화 상대였던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차관급)을 5개월 넘게 만나지 못했던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북한이 급을 낮춰 짝 지워준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를 만나러 평양까지 갔다. 외교적으로 기분 나쁠 수도 있는 걸 미국은 선선히 받아들였다. 미국의 자세 변화라면 자세 변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에 “만날 걸 기대한다. 그(김정은)는 북한이 엄청난 경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경제’라는 단어를 38번 사용한 직후였다. 비건은 이달 초 스탠퍼드대학 토론회에서 북한의 후속조치에 따라 신뢰를 줄 수 있는 상응조치가 준비돼 있다고 강조했다. “동시·병행적 조치”라는 미묘한 언급도 했다. 짧은 단어지만 협상에서 미국의 중대한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변화의 흐름은 지난해 7월 국무부가 마이크 폼페이오 장관의 3차 방북에 앞서 제시한 개념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부터 시작됐다. 기존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CVID)’에서 물러선 것이다. 그 변화는 유연성이다. 미국은 대북 정책의 선택 폭을 넓히고 유연성을 보탰다. 북한 외교술에 밀린 것이든, 계산기 두드린 뒤 미국 이익 극대화를 위해 수정했든, 트럼프 재선을 위한 성과물이 필요했든 중요한 건 변화다. 상응조치로서 유연성의 구체화를 베트남과 경제에서 찾는 것이다.

미국은 1975년 베트남 전쟁에서 치욕적 패배를 한 뒤 베트남에 대한 경제 제재에 들어갔다. 특히 78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제재 강도는 상당히 높아졌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세지자 버티던 베트남은 89~91년 캄보디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미국은 유화적 외교 전략을 펼친다. 그때 시작된 게 전쟁포로와 실종자 찾기, 유해 발굴이다. 이후 관계 정상화 방안들이 논의되면서 93년에 국제 금융기관이 베트남에 첫발을 내딛고, 다음 해 미국과 서방국의 경제 제재는 끝난다. 곧바로 미국과 국제사회의 투자가 이뤄진다. 베트남은 순차적으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고 비약적 경제 발전이 진행 중이다. 베트남의 도이머이(쇄신) 정책도 큰 역할을 했다.

전쟁과 경제 제재, 유해 발굴에 이어 관계 정상화 모색까지 북한도 대미 관계에서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다. 미국은 북한에 “자, 베트남을 봐라”고 할 수 있고, 김정은도 새해 들어 경제를 강조했다. 베트남은 자신의 경제성장 모델이 북한에 적용됐으면 좋겠다며 거든다. 물론 25년여 시차가 있고, 당시와는 국제 안보·경제 상황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다. 더구나 북핵이라는 난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안보·경제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국제 질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북핵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남·북·미 간의 독립된 현안이 아니라 미·중 패권전쟁의 한 자락으로 완전히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 아니 이미 패권전쟁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게 더 현실적이다. 시간이 갈수록 더 복잡해지고 해법이 더 난해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비핵화 외교에서 우리는 마키아벨리스트가 될 필요성이 절실하다. 마키아벨리즘을 단순히 권모술수로만 이해하는 건 옳지 않다. 책략과 음모는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것은 국가 통치철학이고, 현실주의적 정치철학이다. 한마디로 나쁜 수단을 써서라도(좋은 수단을 쓸 수 있다면 더 바람직하겠지만) 좋은 목적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수단을 쓸 때 잘 계산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전제는 있다.

비핵화가 불변의 목표인 것은 확실하지만, 적확한 정세 파악과 함께 전략적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북한이 모든 걸 내놓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 그걸 당장 확보하지 못했다고 우리가 먼저 조금도 움직이지 말자는 건 협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비핵화는 금방 이뤄지지 않는다. 교착보다는 비핵화로 가기 위한 현실적 방안을 작동시키는 게 우리에겐 더 이익이다.

현재로선 북·미가 판을 깰 의사가 없는 것 같다. 비건은 이런 말도 했다. 미 정보기관장들이 의회 청문회에서 대북 불신을 얘기한데 대해 “(나 같으면) 우리가 궤적을 바꿈으로써 북한 정책의 궤적을 바꿀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북한과 외교적으로 접촉하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하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비핵화 문제를 유연하게 가져가려 한다. 우리는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이익이 뭔가를 생각하고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한다. 냉전 때 작동한 화석 같은 사고방식은 현실을 외면하는 거다. 그러면 현실이 우리를 외면한다. 마키아벨리스트적 전략이 필요하다.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