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용목] 나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



한때 대형마트 대신 재래시장을 이용하겠다고 마음먹은 적 있다. 여러 이유 중에는 좀 거창한 것도 있었는데, 대자본 프랜차이즈가 생선 한 마리, 파 한 단까지 독점한다는 것이 끔찍했다고 할까. 내가 먹고 입고 자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몇몇 기업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이익 역시 한 곳으로 흘러드는 것이 무서웠다. 생활 방식이 다양해진 만큼 소비 패턴과 소비재도 다양해졌지만 그 모든 과정을 거미줄처럼 당겨놓은 돈의 흐름은 오히려 한 곳으로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 전체의 부는 늘어나는데 개인은 점점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결심을 두 번밖에 지키지 못했다. 간혹 재래시장을 들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로 여흥을 위한 것이었으니 셈할 수 없는 것들이다. 나는 작은 결심 하나를 지키지 못하는 못난 사람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이 결국 내 탓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 문득, 그게 못마땅했다. 그게 왜 내 책임이지. 음모론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자본은 이미 내 게으름까지 계산하고 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재래시장이나 골목상권의 피해에 대한 책임을, 시장이니 능력이니 하는 구호 속에 개인에게 돌리게끔 설계해 놓은 것 아닌가. 세상은 거대한 시스템을 통해 이미 내 생활 방식까지 결정해 놓고 있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탓하느라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지도 몰랐다.

이번 설날에도 그랬지만 지지 정당이 제각각인 우리 가족은 뉴스를 보다가 곧잘 목소리가 커진다. 이때 재밌는 일이 벌어진다. 좋아하는 정당의 문제는 그 문제를 일으킨 개인의 일로 돌리고, 싫어하는 정당의 문제는 그 정당뿐 아니라 지지자 전체의 문제로 돌린다는 것. 정당의 논리가 개인의 인식을 알게 모르게 통제하는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조직은 그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모든 부작용을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개인의 불행이나 불우를 본인의 능력이나 실패로 치부하는 사회는 무책임한 만큼 폭력적이다. 능력 위주의 경쟁사회에서 누군가는 질 수밖에 없다. 지는 사람도 그 사회의 참여자라면 마땅히 그에 대한 책임도 사회에 있다. 나의 문제는 곧 사회의 문제이다.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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