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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황교익] 광화문광장에서 대보름 달맞이를 상상하다



음력 1월 1일 하루만 설인 것은 아니었다. 섣달 그믐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가 설이었다. 설은 농경시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봄맞이 행사였고, 그래서 걸게 놀았다.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며 축소되고 또 축소되어 이제는 정월 초하루 단 하루만 설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섣달 그믐밤에는 잠을 자면 안 되었다. 도깨비가 출몰하는 밤이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설빔과 설음식을 준비하며 밤을 새웠다. 액운을 가져올 도깨비와 맞서는 밤이다. 날이 밝으면 조상에 차례를 올리고 친인척 집에 세배를 다녔다. 새해에 서로 복을 많이 받자고 덕담을 나누었다. 설 첫날은 조상신을 모셨으니 대체로 조용히 지내야 했다.

다음날부터 놀이가 시작된다. 아이들부터 논다. 제기차기, 팽이치기를 한다. 연을 만든다. 떼로 몰려다니며 논다. 아무 집에 가도 먹을거리를 내놓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른들이 서서히 놀이판을 벌인다. 윷놀이, 널뛰기, 고누놀이 등이 벌어진다. 집안 마당에서 시작된 놀이는 마을 마당으로 나아간다.

풍물패가 조직돼 마을을 돈다. 풍물소리에 온 동네가 떠들썩하다. 풍물패가 집안의 지신을 밟아주면 그 대가로 음식과 돈을 낸다. 추렴이다. 대보름에 한바탕 크게 놀기 위해 분위기도 띄우고 비용도 마련하는 과정이다. 그 음식과 돈으로 대보름의 ‘대행사’인 고싸움, 줄다리기 등을 준비한다.

마침내 대보름날에 마을끼리 한판 붙는다. 이기는 마을에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그러니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놀이에 참여하였다. 보름달이 뜰 무렵 마을 사람들은 뒷동산에 올랐다. 달맞이이다. 아이들은 보름 동안 가지고 놀았던 연을 날려 보낸다. 봄맞이 놀이를 끝내는 것이다. 보름달이 뜨면 달집을 태우며 복을 기원한다. 한 해 무탈하게 온 가족이 편안하고 날씨가 순조로워 풍년이 들기를 빈다. 대보름은 섣달 그믐날부터 시작된 봄맞이 축제인 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날인 것이다.

봄맞이 행사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존재하였던 농경시대 풍습이다. 산업사회로 급격히 변화하면서 축소되고 또 사라졌다. 농민이 줄어드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반도의 사정도 똑같다. 5000년 동안 농민의 나라였다가 어느 틈에 대한민국은 노동자의 나라가 되었다. 현재 한국인 중에 농민은 겨우 4%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노동자이다.

노동자는 보름씩이나 다 함께 놀 수가 없다. 산업화 초기에는 어떤 식으로든 길게 놀아보려고 하였는데 자본주의 사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겨우 3일의 설 연휴가 남았다. 그 과정에서 1월 1일의 설날과 1월 15일의 대보름은 단절되었다. 더불어 설 놀이가 사라졌다. 제기차기, 팽이치기, 연놀이 등등은 고궁에서나 하는 놀이가 되었다. 도시화로 마을이라는 공동체가 사라졌으니 널뛰기, 줄다리기, 고싸움도 할 수가 없다. 도시에서 마을 대항 놀이는 꿈도 꾸지 못한다. 달집태우기도 사라졌다. 설에 놀았던 개별의 놀이는 여러 새로운 개별의 놀이들이 등장하였으니 그렇다 쳐도, 공동체 놀이가 사라졌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농경국가에서 문득 산업국가로 바뀌었다 하여도 공동체 놀이를 잘 유지하고 있는 국가들이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 축제라는 것이 그 역사를 보면 대부분 전통의 공동체 놀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농경시대의 공동체 놀이를 계승하지 못하였다. 한민족의 최대 명절이라는 설 풍습조차 조각나 낱낱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설날 증후군’이라는 스트레스만 남겨두고 있다.

광화문광장 촛불혁명 기간에 설이 끼여 있었다. 대보름에도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밝혔다. 그때 광장에서 나는 어린 시절 뒷동산에서 보았던 달집을 떠올렸다. 둥근 보름달을 향해 맹렬히 타올랐던 그 불꽃이 눈에 어른거렸다. 광화문광장을 넓힌다 하는데, 그 광장에서 대보름날에 온 국민이 모여 커다란 달집을 세우고 불태우는 장면을 상상한다. 1년에 한 번 정도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놀이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하는 상상이다.

황교익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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