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하주원] 괜찮은 척



정신건강의학과에 와서 행복한 추억부터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진료실에서 아픈 이야기를 종일 듣자면 뉴스에 나오는 비극은 세상사 중 극히 일부구나 싶다. 많은 이들이 비극을 주변과 공유하지 않는다. 엄청난 일을 겪고도 혼자 간직하거나 극소수에게만 털어놓기도 한다. SNS에서 늘 재미있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도 실은 괜찮은 척하며 살아내는 것이다. 괜찮은 척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슬픔을 나누면 위로를 주고받으며 고통이 줄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많다. 배려해 주지는 않으면서 생색만 내거나 어쭙잖은 위로로 상처를 후벼 파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했으니까 이런 일이 생긴 거야”라며 나쁜 일을 당한 사람을 탓하거나, “이제 좀 괜찮을 때도 되지 않았어?”라고 감정을 숨기라는 강요나 고통을 깎아내리는 경우도 많다. 차라리 괜찮은 척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디까지 괜찮은 척하고 어디서부터 진심을 드러낼까. 괜찮은 척을 제대로 잘하며 살기 위해서는 괜찮은 척하는 그 순간에, 적어도 지금 괜찮은 척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제대로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심리적 방어기제 중에 억압과 억제가 있는데 둘이 비슷해 보이지만 억압은 미성숙, 억제는 성숙한 방어기제로 분류한다. 억압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생각이나 느낌을 눌러서 무의식의 세계로 밀어 넣는 과정으로, 이를 지속하면 감정이 이상하게 표출된다. 모호한 신체 증상 또는 특정 부분의 기억을 잃는 해리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떻게 저 상황에서 저런 마음이 들지 싶은 부적절함, 또는 저렇게 똑똑한 사람이 어쩜 뻔한 거짓말을 할 수 있지 싶은 일이 생긴다. 고통을 대면하느니 그냥 잊는 방식의 극단적 억압을 하면 정말 기억이 안 날 수 있다. 나중에는 괜찮은 척하는 내 모습과 실제 내 고통을 스스로도 헷갈린다. 반면 억제는 자기감정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예컨대 ‘힘들지만 미워한다고 그 사람 안 볼 수 없더라. 하루만 참고 괜찮은 척 지내보자’라고 결심하는 의식적 과정이다. 괜찮은 척해도 된다. 무엇을 느끼든, 어떻게 말하든 내가 왜 그러는지 알고 나의 속마음끼리 싸우지 않는 것이 먼저다.

하주원 (의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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