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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박상익] 독서는 자아발견의 수단



“너 왜 의사 하냐?” “엄마가 하라고 해서요.” 대학병원 교수와 수련의가 나눈 대화다. 텔레비전 드라마 ‘SKY캐슬’의 한 장면이다. 젊은이들이 진로와 적성을 스스로 찾지 못하는 세태를 풍자한 대사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작가 이병주는 “돈이 발언하면 사람이 침묵한다”고 했다. 물질만능 세상에서 돈이면 그만이지 자아발견이 대수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돈 때문에 한 번뿐인 인생을 낭비할 수야 없지 않은가. 자아발견의 수단으로 독서보다 유용한 것이 있을까 싶다. 먼저 시 한 편을 보자.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이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다. 시인 자신은 이 시의 초점을 3연의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봤다. 하지만 모든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저 나름의 생명력을 갖는 법. 김현승(그 또한 시인이다)은 이 시의 가치가 1연과 2연에 있다고 말한다. 봄의 소쩍새와 여름의 천둥을 언급함으로써, 한 생명의 탄생에 얼마나 많은 섭리와 준비가 있어야 하는지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신비와 존엄을 강조한 시라는 것이다. 시인과 평론가 둘 중 누가 시의 본질을 제대로 읽었는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같은 시를 놓고 다른 의미를 읽어낸다는 게 흥미롭다. 미국 역사가 칼 베커는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사상을 명료하게 밝혀주는 책, 그들의 마음이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던 사상을 제시해주는 책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요컨대 김현승은 ‘자신의 사상을 명료하게 해주는 부분, 자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던 사상을 제시해주는 부분’을 1연과 2연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러면 김현승의 사상은 무엇인가. 그는 인간의 삶을 두 유형으로 보았다. 즉 헬레니즘적인 낙천 향락적 유형과 헤브라이즘적인 금욕적 진지한 유형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을 후자, 곧 헤브라이즘적인 유형으로 파악했다. 김현승은 1975년 4월 11일 재직하던 숭실대 채플시간에 기도하다 쓰러진 뒤 6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런 그가 화려한 꽃보다 진실한 열매를 소중히 여기고, 외향적인 웃음보다 내향적인 눈물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고자 한 것은 자연스럽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영혼의 결’을 갖는다. ‘정체성’ 또는 ‘개성’이라 말할 수 있다. ‘너 자신을 알라.’ 쉽지 않다. 힌트는 칼 베커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사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책 읽기다. 광범한 독서가 필요하다. 닥치는 대로 읽는다. 차츰 ‘영혼의 결’에 맞는 사상을 발견한다. 자아발견의 시동이 걸린다. 독서를 통해 자아와 정체성은 또렷해지고 확장된다. 개성의 자각이다. 내 가슴속의 ‘북극성’을 발견한다. 나만의 적성과 진로를 찾아낸다. 자아실현의 궤도에 오른다.

물론 자아발견의 수단이 책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자아를 발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칼럼의 독자들도 책에서 길을 찾은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 인구는 갈수록 줄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책 안 읽는 문제를 정책 결정권자들이 심각한 문제로, 사회적 위기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텔레비전의 책 읽기 프로그램도 시청률 핑계로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정부도 언론도 길을 잃었다.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윤똑똑이 엘리트들이 넘쳐나는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 나라 독서 정책 결정권자들 중에는 ‘북극성’을 찾지 못한 윤똑똑이들이 얼마나 많기에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하고 있을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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