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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지호일] 640만 달러의 미련을 버려라



미련(未練). 옛 연인의 결혼 청첩장을 받고도 이 사랑이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는 남자. 실형 선고를 받고 끌려 나가는 순간에도 판결이 번복되지는 않을까 다시금 재판장을 쳐다보는 피고인. 선거 출구조사에서 큰 표 차로 패배하는 결과가 나왔는데도 밤새 TV 화면에서 눈을 못 떼는 후보자. 이런, 결말이 바뀌지 않을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여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우리는 미련이라 부른다.

여기 640만 달러가 있다. 10년 전 불쑥 세상에 존재가 알려졌던. 한쪽은 뇌물이라 했고, 한쪽은 선의의 투자금이라 했지만, 끝내 비극적 결과와 함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캐비닛에 봉인됐다. 그리고 영화 ‘천녀유혼’의 나무요괴에 붙잡힌 애처로운 영혼처럼 10년이 지나도록 여의도와 서초동을 오가며 떠다닌다.

2009년 6월 12일 중수부는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직 대통령을 사납게 뒤쫓던 검찰이 부엉이바위 앞에서 하릴없이 철수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뇌물수수 의혹 사건. 혐의 요지: 2006년 9월~2008년 2월. 박연차로부터 4회에 걸쳐 미화 합계 640만 달러 등 뇌물수수. 처리 결과: 노 전 대통령에 대하여는 내사종결(공소권 없음) 처분. 박연차에 대하여는 내사종결(입건유예) 처분.>

640만 달러를 실제 받아 사용한 쪽은 처벌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 모르게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혐의 구조상 정점인 노 전 대통령에게 법적 책임이 있으며, 그의 죽음으로 사건은 끝났다는 게 검찰 수뇌부의 결정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나지는 않았다. “박연차의 자백과 이를 뒷받침하는 관련자들의 진술, 송금·환전 자료 등 제반 증거에 의하면 피의사실은 인정됨…다만 이번 사건에 관한 역사적 진실은 수사기록에 남겨 보존됨.” 미련의 싹을 남긴 것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을 거쳐 자유한국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도 여전히 640만 달러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다.

지난 3일 640만 달러 수수 의혹 고발인 조사가 있었다. 검찰에 나간 주광덕 한국당 의원은 “참여정부에서 발생한 부정부패 사건에 대해서도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이자 적폐청산의 진정성을 부여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대검 캐비닛을 열라”고도 했다. 앞서 한국당은 2017년 10월 노 전 대통령 가족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했다. “다스는 누구 것입니까”라는 시중의 의문이 확산되던 때였다.

1년3개월 만의 고발인 조사지만 그것은 수사 본격화가 아니라 멈춰 섰던 수사가 종착지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보였다. 그 끝은 아마 ‘각하’일 것이다. 최소한 불기소 처분 이상의 결과는 나올 것 같지 않다.

캐비닛을 연다 해도 누렇게 바랜 수사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 뿐, 10년 전 굳어진 내용물은 그대로일 테니까. 노 전 대통령은 중수부 조사실에 나와서도 완강히 뇌물 혐의를 부인했다. ‘피의자’ 진술은 이 수준에서 멈췄다. 그 가족이나 박연차 회장이 지금에 와서, 그것도 뇌물 공범으로 처벌받길 각오하면서까지 “그 돈은 부정한 지원의 대가였다”고 진술할 리 만무하다. 한국당은 사실 관계를 뒷받침할 새로운 증거나 법리 검토 결과를 제시하지 못했다. 막연한 수사 촉구는 죽은 수사를 되살려 움직이게 할 동력이 되지 못한다. 한국당 율사들도 아는 사실이다.

640만 달러가 이슈화된 시점은 어떤가. 박근혜정부에서도 잠잠하던 이 돈은 탄핵심판이 열리던 무렵부터 고개를 들더니,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궁지에 몰리던 때에 고발로 이어졌다. 애초 정치적 성격이 짙었다. “MB의 가족은 건들지 마라”는 메시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됐건 한국당은 정치보복 수사를 중단하라며 지금의 여권이 대표적 보복수사 사례로 지목하는 640만 달러를 내미는 모순을 택했다.

검찰은 사법농단 수사를 마무리한 이후 오랜 640만 달러의 부담도 털어버리려 할 것이다. 한국당도 640만 달러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할 때다. 여기에는 한국당이 얻어낼 명분도, 실익도, 정치적 효과도 없다. 오히려 여론은 한국당의 처사를 욕하거나 조롱하는 쪽으로 흐르고, 민주당은 상대방의 헛발질을 속으로 즐기지 않을까. 640만 달러, 이 ‘노무현 콤플레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한국당은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미련이 반복되면 미련함을 낳는다.

지호일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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