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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김의구] 묵은 냉장고를 정리하며



오랜만에 냉장고를 정리하다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복병’과 맞닥뜨리게 된다. 냉기가 흘러나오는 안쪽 깊숙한 곳에 묵은 햄이나 소시지, 데워먹는 즉석음식이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발견된다. 키 높은 반찬통들 뒤에선 테두리에 검은 녹이 슨 통조림이 떡하니 나타나기도 하고, 개봉해 접어둔 분말카레가 나와 기분을 잡친다. 때로 검은 비닐로 둘둘 말려 있어 열어보지 않고는 정체가 확인되지 않는 ‘괴물체’가 등장하기도 해 가족 모두를 아연하게 만든다.

문제의 물품에 처분을 내려야 하는 제2라운드는 더 힘들다. 정체불명의 경우는 오히려 손쉽다. 기억을 되살린 뒤 육안으로 확인해 먹을 수 있는지를 가려 선선히 처리하면 된다. 문제는 유통기한이나 제조연월일이 박혀 있는 제품들이다.

“유통기한이 좀 지나도 내용물이 괜찮으면 먹어도 돼.” “그러다 탈이 나면 오히려 손해니까 그냥 버립시다.”

“유통기한은 유통업체에서 팔 수 있는 기한이다. 먹을 수 있는 기한과 다르다.” “상하지 않았더라도 맛이 떨어지니 싹 버리고 새로 삽시다.”

유통기한과 품질유지기한이 다르고 라면은 8개월, 냉동만두는 1년, 참치캔의 경우 유통기한이 10년이 지나도 먹을 수 있다는 학구적인 설득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음식 함부로 버리면 벌 받는다” “죽도 못 먹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한번 생각해 봐라”는 말까지 나오면 본격적인 세대갈등이다. “군에 있을 때는 논물에 식기를 씻어 먹기도 했어. 면역력이 있어 웬만큼 잘못 먹어도 문제없어. 몸은 너무 챙기려다 보면 오히려 약해지는 거야.” 이쯤 되면 아이들은 입을 닫는다. 그렇다고 승복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의 재료로 만든 요리는 아예 입에 대지 않는 방법으로 저항한다.

유통기한 문제는 집안의 숙제요 그중에서도 난제다. 장래가 걸린 상급학교 진학이나 문이과 결정, 직업 선택 같은 문제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길을 찾게 된다. 아이들의 뜻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원칙을 첫째로 두고 사회 선배로서의 조언을 제시하면 어렵지만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 한데 묵은 음식을 놓고는 타협이 어렵다. 밥알을 남기지 말고 깨끗이 비우라는 지적에는 순순히 따르던 아이들이 도무지 물러서지 않는다.

얼마 전에도 한바탕 세대 간 설전을 치른 뒤 치밀어 오른 부아를 섞어 우걱우걱 유통기한 지난 반찬을 혼자 비우다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 쉰내가 나는 된장찌개를 팔팔 끓여 다시 드시던 외할머니를 꼭 닮은 어머니다. 짜증을 부려도 못 들은 척하시더니 급기야 찌개 그릇을 낚아채 내용물을 다 쏟고 나서야 포기하셨다. 그때 어머니도 당신을 따라오지 않던 자식들과 남편을 야속하게 느끼셨을까. 자식들이 어른이 되면 이해해 주리라 생각하셨을까.

아이들이 자란 환경은 우리네랑 매우 다른 게 사실이다. 급속한 변화가 특장이었던 대한민국 사회여서 더욱 그렇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5분 거리에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가게마다 온갖 물건이 즐비하다. 텃밭에서 가꾼 채소들로 반찬을 만들었고 10리 넘는 길을 걸어 5일장에 가야 간고등어 한 손을 새끼에 꿰들고 올 수 있었던 할아버지 시절과는 완전히 다르다. 시골에서 자라 대도시에서 성장한 세대는 그 중간쯤이다.

가성비란 공식 아래 값이 웬만큼 비싸도 만족도만 높다면 지갑을 열 수 있는 게 요즘이다. 학교 공납금을 제때 못 챙겨 울며 등교하거나 신문지를 비벼 화장지로 쓰고 새 검정고무신을 받으면 닳을까 봐 손에 들고 걷던 그런 시대가 아니다.

시대의 차이를 인정하지만 유통기한 지난 라면은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 처량하고 궁색해 비치더라도 다 먹을 생각이다. 나이가 들수록 젊은 얘기를 귀담아듣고 포용력을 늘려야 한다는데 ‘꼰대’가 돼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럽기는 하다. 시간이 지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가슴에 앙금으로 남지 않을까 걱정도 든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이것만은 이해해주면 좋겠다. 우리가 쉽게 물러서지 못하는 게 결코 돈이 아까워서는 아니다. 자원 자체가 귀한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누군가는 겪고 있고, 앞으로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먹을 만한 음식을 버리면 반사적으로 죄의식을 느끼는 우리는 절약이 미덕인 시대에 자랐다. 그래서 그저 소비가 아니라 합리적 소비만이 미덕이라 믿는다.

김의구 제작국장 겸 논설위원 e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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