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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저도 제사장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말의 사용 빈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설교자 중엔 단어 노출 횟수까지 밝히며 이를 강조한다. 제사장이란 말도 그중 하나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만 728회가 등장한다. 대제사장이란 말까지 합치면 875회나 된다. 900번에 육박할 만큼 자주 나오는 제사장이란 누구일까.

성경을 요약하면 이렇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해 성막과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다. 제사는 번제(燔祭)가 대표적이다. 번제는 제물을 태우는 제사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할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 제사장은 이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동물을 불살랐다. 구약 백성들은 이렇게 희생제물과 제사장을 통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 제사장은 백성들에게 신앙을 가르쳤고 중대사가 있을 땐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도 했다.

제사장은 아무나 할 수 없었다. 레위 집안 중 아론의 가문에서 세워졌다. 아론은 최초의 대제사장이었다. 대제사장은 아론의 장자 계열이 승계했다. 제사장은 레위 집안 여성과만 결혼해야 했으며 몸에 흠이 없어야 했다.

다윗시대 제사장은 아론 자손 중 엘르아살 계열과 이다말 계열 출신들이 직무를 수행했다. 솔로몬 시대에는 사독 집안이 제사장 직무를 수행했다. 사독 가문은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제사장 지위를 독점했다. 이들은 신구약 중간기 때 사두개인이라 불리는 당파를 형성하면서 정치적 성향을 띠었고 제사장 직책의 순수성을 상실한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면서 제사장은 더 이상 그 기능을 지속할 수 없게 됐다. 현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은 ‘코헨’이나 ‘레비’ 등 유대인 이름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지파 개념은 2000년 디아스포라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종교적 기능은 랍비들이 맡고 있다. 주로 결혼이나 장례 등을 담당한다.

성경을 읽는 신자라면 구약의 제사장 제도는 영원하고 유일한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히 8:5)이라는 선언과 만난다. 제물 되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림으로 동물 제사나 제사장의 도움 없이 누구든 하나님 앞에 나가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벧전 2:5)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신자들을 격려했다.

언제부턴가 기독교 안에 이 구약의 제사장과 목사를 동일시하는 흐름이 형성됐다. 존 스토트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과 목사를 동일시하고 성찬을 기독교식 제물로 간주하는 것은 3세기 중엽 카르타고 감독이었던 키프리안에 의해서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경향은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사제와 평신도의 엄격한 구분, 사제 없이 미사가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었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이 말하는 만인제사장직을 복원하면서 제사장은 곧 신자라는 등식을 재확인했다.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세창미디어)라는 책에서 다소 거친 어조로 분명히 말한다. “기독교에서 사제 신분이란 관리자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직무를 수행하는 한, 맡은 업무에서 우선권을 갖습니다.… 지금 그들은 소위 삭제할 수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고안해냄으로써 평신도와는 다른 어떤 존재라고 지껄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들이 날조한 말 내지 법칙들입니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뿌리 위에 있다. 따라서 제사장은 목사라고 규정할 수 없다. 다만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고 신자들을 지도한다는 점에서 제사장 역할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의 장로나 감독은 오늘날 목사였다. 베드로도 자신을 장로로 불렀다.(벧전 5:1) 그렇다면 목사 이외 신자들의 제사장 역할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고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는다. 내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한다.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한다. 악독과 격정과 분노, 소란과 욕설을 버린다.(엡 4:25~32)

개인적으로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오늘을 살아보련다. 일단 인사라도 잘하고 싶다. “안녕하세요. 저는 제사장입니다.”

신상목 종교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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