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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권기석] 20대 성 갈등의 기원



미국 대학에서 연수할 때 ‘아시아의 인구 문제’라는 강의를 청강했다. 수업 전 강의 이름을 보고 적지 않은 기대를 했다. 우리나라의 인구 문제에 관한 외부의 시각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첫 시간 받은 강의계획서에 한국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계획서에 소개된 논문의 상당수는 중국에 관한 것이었다. 강의 제목을 ‘아시아의 인구 문제’가 아니라 ‘중국의 인구 문제’라고 했어야 옳았다. 한국에 관한 언급은 강의가 시작되고 몇 주 뒤 나왔다. 그 주의 수업 주제는 ‘사라진 여아들’이었다. 미국인 교수는 중국과 인도에서 남아선호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야기했다. 두 나라에서 딸이라는 이유로 아기를 버리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도 보여줬다. 그러면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남아선호 현상의 추세가 뒤집어진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했다.

지금은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꽤 심각한 수준으로 아들을 더 원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래전 신문에나 나올 이야기를 외국인 학자가 주목한 걸 보면 이 변화가 우리 생각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남아선호 현상이 머리에 떠오른 건 지난달 한 설문조사 결과를 받아보고 나서다. 신문 창간 30주년을 맞아 한국사회의 갈등에 관한 조사를 했는데 20대 응답자의 답변이 뜻밖이었다. 가장 심각한 사회갈등을 고르라는 질문에 20대의 절반 이상이 빈부갈등도 이념갈등도 지역갈등도 아닌 ‘성(性)갈등’을 택했다. 이들은 차별 경험도 다른 세대와 달랐다. 20대 여성은 10명 중 7명이 본인이 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을 불편하게 여기는 시각도 20대 남성에게서 가장 강했다. 설문조사 결과는 숫자로 표시됐지만 그것만으로도 20대가 다른 세상에서 온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기성세대와 다른 인식을 갖게 했을까. 과거 인구통계를 찾아보니 지금 20대는 남아선호 현상이 정점에 이른 시기에 태어났다. 여자 출생아 100명당 남자 출생아를 나타내는 출생성비는 1988년 113.2로 110을 넘어선 뒤 2002년까지 10여년간 추세를 이어갔다. 20대 남성 상당수는 여자 짝이 부족한 교실에서 학교를 다녔을 것이다.

이들이 한창 자라고 학교 교육을 받은 기간에는 출생성비가 완화됐다. 성비는 2003년부터 정상 수준인 105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단지 출생성비만 완화된 것은 아니었다.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됐고(2004년) 호주제가 폐지됐다(2005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남아선호 현상이 사라진’ 시기는 바로 여성 지위에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20대는 이 시기에 10대 시절을 보낸 것이다.

이런 과도기적 상황이 20대의 상대 성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20대 여성은 10대를 지나면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가치를 앞 세대보다 훨씬 더 깊이 체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직 과정과 사회생활에서 맞닥뜨린 차별 현실은 이들을 분노하게 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들 선호 시절 태어난 20대 남성에게는 ‘내가 더 선택받은 존재’라는 의식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그래서 변화하는 현실을 더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일지 모른다. 여기에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취업난은 20대 남성과 여성의 간극을 더 벌리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남아선호 현상을 불러온 것은 80, 90년대 인구정책이다. ‘하나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는 국가의 압박이 사람들로 하여금 비정상적 선택을 하게 했다. 이 정책은 출산율이 인구 대체 수준 아래로 떨어졌는데도 계속 추진돼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앞의 가설이 입증되면 이 정책에는 또 다른 비판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출산 행위에 국가가 과도하게 개입한 것이 결국에는 세대 내 갈등의 기원이 됐다고 말이다.

권기석 사회부 차장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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