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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칼럼] 보수 정치의 궤멸 위기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친박 비박 갈려 치르는 한국당 전당대회는 탄핵 극복 못했다는 증거,
가치재정립 고사하고 ‘남은 잔칫상’에나 몰두하는 꼴
성찰 없으니 여권 프레임에서 헤어나지도 못해…
대표 선출 과정에서 공감과 믿음 얻지 못하면 정말로 궤멸할지 모른다


최근 들어서 보수 궤멸이란 표현은 잘 나오지 않는다. 이 정권 초기에는 이 단어가 정치인들 사이에서, 언론에서, 시중의 안줏거리로 늘 오르내렸다. 그러나 전 정권에서나 있었겠지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현 정권의 국정운영이 기대보다 훨씬 떨어지자 보수 야당 지지율이 조금 올라가고 보수 궤멸이란 표현은 쑥 들어갔다. 보수는 살아나고 있는 걸까. 보수 정치는 궤멸 위기에서 완전히 탈출한 걸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수 전체의 상황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궤멸 직전까지 갔던 사정을 감안한다면 아주 추상적으로만 기술할 수밖에 없을 테고, 보수 주류의 흐름이 어떻게 될지도 불투명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보수를 관찰하고 가늠할 수 있는 대상은 보수 야당이다. 사실 보수의 움직임을 찾아볼 다른 대상도 거의 없다. 품격 있는 보수주의의 시조라 일컬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영국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1729~1797) 이래 민주주의가 앞선 서구 일부의 보수주의는 자유주의 또는 진보 세력과 200여년 동안 치열하게 지적 싸움을 벌여왔다. 사상과 정책에서 정당보다 우위에 있는 싱크탱크나 지식인 계층 그리고 낮은 단계의 구체적인 풀뿌리 자치까지, 우리에겐 축적된 경험이 일천해 달리 돌아볼 곳이 없는 탓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 탄핵이라는 쓰나미가 덮쳤고, 보수는 궤멸 직전까지 갔다. 그리고 그 진영을 대표하는 정당의 대표를 뽑는 국면이 왔다. 그러므로 다음 달 자유한국당의 전당대회는 일단 단기적 흐름에선 한국 보수의 의미 있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도 2020년 총선과 2022년 대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이데올로기를 혐오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란 추상적이고 자기신념에 가득 찬 정치적 독단을 말한다. 보수는 책임과 자율, 공동체 가치를 중시한다. 이념과 독단보다는 일반적 규칙을 신뢰한다. 대개 폭넓은 합의와 오랜 경험으로 검증된 규칙이다. 보수는 이 규칙을 시대와 환경에 따라 신중하고 변화에 맞게 적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전당대회를 앞둔 한국당은 낙제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선 탄핵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내 정치세력의 경계선이 친박이냐, 비박이냐로 나눠지는 건 보수의 정치가 전 대통령 박근혜라는 이데올로기를 극복 못했다는 뚜렷한 증거다. 서글프고 참담한 보수 정치의 현실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황교안 전 총리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고, 10명 안팎의 선수가 뛴다고 새로운 보수가 형성될까. 전에 잠시 외쳤던 보수의 가치 재정립이란 말도 이젠 없다. 오로지 먹다 남은 잔칫상을 누가 차지하느냐다. 가치 재정립이나 보수 재건, 노선 투쟁 같은 기본은 어디도 보이지 않는다. 가던 길 그대로 가겠다는 게 아니면 이럴 수 없다.

둘째, 이미지 개선에 실패했다. 전보다는 덜 하다고 하나 보수 정치인들에게선 웰빙과 가진 것 빼앗기지 않겠다는 이미지가 여전히 짙다. 여권의 적폐청산 프레임을 부수지 못하고 대거리만으로 세월을 보냈다. 북한 문제도 여권이 짜놓은 전략 속에서 무조건 반대 입장만 견지한다. 지방선거나 당 비대위 활동 같은 몇 차례 기회는 있었으나 역시 ‘조금 남은 잔칫상’에만 몰두한 것이다. 여권의 프레임과 다른 프레임으로, 여권의 언어와 다른 언어로 국민의 공감을 얻어야 했다. 그런데 그 프레임에 갇혀 같은 언어로 정치를 했으니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할 수밖에.

셋째, 위와 같은 이유로 떨어지는 문 대통령의 지지율을 자기 것으로 전혀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대체 정치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최근 지지율 상승은 탄핵이라는 비정상의 기저효과일 뿐이다. 20%대는 어느 경우에도 나오는 무조건 지지율이다.

결론적으로 보수는 아직 궤멸 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성찰이 없으니 새로운 가치가 생겨날 리 없다. 그러니 친박이니 비박이니 하는 게 기준인 것이다. 조금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문재인 정권 싫은 사람 다 모여라’ 정도밖에 안 된다. 이 전략으로 권력을 다시 찾겠다는 건 정권의 결정적 실수나 하자가 드러나는 경우 외에는 없을 듯하다.

보수 정치는 무엇보다 공감능력을 높여야 한다. 유튜브 정치에서 재미 좀 보는 것으로 보수 정치가 다시 시선을 모으고 있다고 판단하는 건 어리석다. 진보든 보수든 어차피 열성 지지층끼리 돌려보는 것으론 확장의 한계가 있다. 자기들끼리 사이다 발언하고 결집을 공고히 하는 효과 정도일 것이다.

앞으로 한 달 반의 한국당 전당대회 과정이 어쩌면 보수 정치가 최소한의 믿음을 확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 모른다.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뭔가를 내놓고 보수 내 치열한 싸움을 하지 않으면 상당히 긴 세월을 이 상태로 지내야 할 게다.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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