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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정윤수] 스포츠 폭력, 고양이한테 생선 맡기지 말라



참담한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10여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의 구성과 추진에 따라 스포츠 폭력과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실태조사 및 가이드라인 작성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단 한 뼘도 변하지 않은 사태를 다시 마주하고 있다. 문제는 10여년 만에 사건이 재발한 게 아니라 그 긴 세월 동안 이 사태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범죄들이 지속적으로 벌어졌다는 점이다. 가해자는 슬그머니 돌아왔고 때로는 더 높은 자리에 앉았다. 피해자는 숨어 지내야 했고 급기야 운동을 그만두곤 했다. 이른바 침묵의 카르텔! 그러나 이렇게 ‘카르텔’이라고 하는 순간 가해자는 흐려지고 책임자는 알 수 없게 된다. 일차적으로 각 사건은 형사적으로 반드시 단죄되어야 한다. 긴급하고도 강력한 처벌은 아직도 끔찍한 시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웅크리고 있는 수많은 피해자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죄와 벌’만이 능사는 아니다. 조재범 전 빙상 코치의 성폭력 가해 행위는 스포츠계에 국한된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폭력 및 성폭력의 발생 구조와 다를 바 없다. 용기 있는 결단을 보여준 각 분야의 미투 운동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는 정치, 교육, 문화, 종교 전반에 걸쳐 폭력과 성폭력이 만연해 있다. 분야는 서로 달라도 남성 권력의 강력한 위계질서라는 기본 구조와 사생활까지 완전하게 통제해버리는 원인은 공통적이다.

스포츠라는 특수한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폭력 구조와 다를 바 없다고 인식할 때 문제 해결 역시 ‘특수’가 아니라 ‘보편’에서 시작할 수 있다. 보편적으로 판단하기에 청소년 시기에 공부를 안 해도 되는 경우는 없으며 누구든지 맞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선수 역시 마찬가지다. 신체 능력을 겨루는 분야라고 해서 중·고교 때부터 사회와 완전히 차단된 채 합숙소, 전지훈련, 경기장 등을 전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스포츠를 특수라는 예외 상태에 놓게 되면 강력한 신체 통제에 이은 정신적 지배까지 허용하게 되고 결국 폭력과 성폭력의 비극이 반복된다.

‘운동하는 사람들’이라는 무지와 편견도 극복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선수들은 더욱더 사회와 고립된다. 운동하는 사람들의 이른바 인성이나 자질이 부족해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오판하게 되면 범죄 구조는 희석되고 그 원인은 개인 일탈로 축소된다. 이것이 모든 권력, 특히 스포츠 권력이 지금 이 순간 기대하는 사태의 결말이다. 자질이 부족한 코치 몇 명을 솎아내고 예방교육 몇 번 시행하면 또 그뿐이다.

이번 기회에 스포츠계의 폭력과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독립적인 기구를 창설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10여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의 스포츠인권 가이드라인 작업 이후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선수들의 인권 상태를 향상시키기 위한 기구를 만들기는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대한체육회와 그 산하 단체의 부서로 설치되었다. 거대한 먹이사슬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완전히 독립적인 기구가 필요하다. 문체부와 대한체육회가 중심이 되고 여기에 이른바 각 분야 전문가가 대거 참여하는 것은 일종의 자문회의로 결국 형식적인 보고서로 그치고 만다. 대거 참석하는 것은 모양새만 그럴듯할 뿐 자칫 덕담만 나누다가 해산할 공산이 크다. ‘대거 참석자’ 중에는 필경 폭력 구조의 대변자가 포함되기 마련이다. 이는 위험하다. 이를테면 완전한 국가 독립기관이었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상정할 수 있겠으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사실상의 독립활동이 보장됐던 문체부 산하 민관합동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를 적극 참조할 필요가 있다.

문체부가 그 조직의 운영을 위한 행정적 지원을 하되 실질적으로는 스포츠, 인권, 성폭력 등에 상당한 전문성을 가진 대여섯 명 규모의 책임 있는 위원회 구조가 되어야 한다. 독자적이고 체계적인 현장조사를 실시할 수 있어야 하며 향후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감독과 지휘가 가능한 ‘스포츠인권센터’를 명실상부한 독립기구로 만들어야 한다. 인지된 혐의를 수사기관에 신속히 이첩해 그에 상응한 처벌이 가능하도록 해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이럴 때마다 거론되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두 번 다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서는 안 된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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