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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박재찬] ‘본 어게인 2019’ 가능할까



며칠 전 한 미국인의 부고를 접했다. 세계 5위 규모의 미국 방산업체인 레이시온을 20년 넘게 이끌었던 토머스 필립스다. 레이시온은 토마호크 같은 미사일을 비롯해 인공위성, 레이더 등을 개발·생산해 지난해에만 253억 달러(28조2000억원)의 매출을 냈다. 95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필립스에겐 ‘굴지의 방산업체 CEO 출신’ 같은 수식어가 어울린다. 하지만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한 블로그에선 ‘한 사람의 일생을 바꾼 주인공’으로 그를 소개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의 정치 스캔들인 워터게이트 사건이 미국을 뒤흔들던 1973년 여름, 당시 닉슨 대통령 특별 고문이었던 찰스 콜슨은 사면초가에 놓인 처지였다. 대통령의 친구이자 잘 나가던 변호사 출신인 그가 워터게이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던 때였다.

뜨거운 8월의 어느 날, 그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절친’을 찾아갔는데, 그가 바로 필립스였다. 콜슨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자신의 심경을 친구에게 몽땅 쏟아냈다. 당시에 이미 성공한 CEO였던 필립스는 콜슨에게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신앙을 통해 자신의 삶이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됐는지, 이른바 자신의 ‘본 어게인(born again·거듭남)’ 스토리였다. 콜슨은 친구의 종교적 체험 고백이 다소 생소했지만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 친구 집을 나와 자신의 자동차로 향하는 도중 그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밤 나는 나 자신의 죄를 직시했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 이런 고백을 하면서 필립스를 만났던 그 여름날 밤이 본 어게인한 날이었다고, 인생이 바뀐 날이라고 회고했다.

7개월간의 복역을 마친 콜슨은 이전과 다른 인생 항로를 택했다. 그는 교도소 선교회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가졌던 자신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내려놓은, 철저히 본 어게인에 따른 결정이었다. 2012년 그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 단체는 설립자 콜슨의 유지를 받들어 현재 120개국에 지부를 둔 세계 최대 교정 선교·봉사 NGO로 활동하고 있다. 본 어게인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얘기다.

비단 종교적 영역이 아니더라도 본 어게인은 작금의 한국사회가 깊이 되새길 만한 가치다. 본 어게인은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출발해 보자는 ‘비긴 어게인(begin again)’같은 개념과 다르다. 한국 축구의 ‘어게인 2002’ 구호처럼 왕좌 복귀를 추구하는 의미와도 궤를 달리한다. ‘전인격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일컫는 종교적인 의미의 거듭남처럼, 차원과 성질이 완전히 바뀌는 화학적 변화에 가깝다.

인간이 만든 제도적 측면에서 보면 본 어게인과 가장 가까운 말은 ‘혁신’이다. ‘묵은 관습과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꿔서 새롭게 한다’는 사전적 정의처럼 완전히 갈아엎는 총체적 변화를 뜻한다. 종교에 있어서 거듭남은 중요하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혁신은 필수불가결한 과제다. 정보통신기술을 융합한 초연결·초지능 사회에 안착할 수 있느냐의 성패가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콜슨의 경험처럼 본 어게인(또는 혁신)은 고통을 수반한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앞선다. 기존의 가치관과 익숙함, 기득권과의 충돌과 갈등도 불가피하다. 달리 말하면 혁신의 과정은 대화와 타협, 조율과 양보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쪽저쪽의 입장을 헤아리되 늦지 않은 선택과 결단의 지혜도 요구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드러난 키워드가 혁신이다. 구호만 있고 제도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경제·산업 분야의 각종 규제 혁신이 1순위 과제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은 혁신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본 어게인 2019’를 기대해본다.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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