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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이경원] 그대여, 야구와 같다면



그는 그때 진갑용의 아내가 관중석에 있는 걸 몰랐다고 했다. 1999년 어느 여름날, 근소한 차이로 끌려가던 경기 막판 승부처였다. 김인식 당시 두산 베어스 감독은 대기타석의 진갑용을 돌려세우고 신인 홍성흔을 내보냈다. 진갑용의 표정이 밝을 리 만무했지만 선수단은 이내 환호했다. 홍성흔이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는 역전 적시타를 때렸기 때문이었다.

“감독으로서의 결정은 맞아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김 전 감독은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로 놔둬도 진갑용이 적시타를 칠 수도 있었어. 모르는 거야.” 성공한 대타 작전을 자랑스레 회고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만세를 부르는 관중 틈에서 진갑용의 아내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는 건, 뒤늦게 전해 들었다고 했다.

시시각각 찾아드는 결정의 순간, 그렇게 경기에 넣고 빼고, 울고 웃고…. 프로야구 1군 감독으로서만 1000번씩을 이기고 지고, 태극마크를 달고는 도쿄돔에 갈 때마다 드라마를 써온 김 전 감독이었다. 그만큼 야구에 대해 무언가 말할 수 있는 이도 없을 것이다. 동네 아저씨들과 국회의원이 야구를 쉽게 떠들 때, 정작 국민감독은 “정답은 모르는 것”이라고 겨우 말한다.

미국프로야구(MLB) LA 다저스에서 뛰는 류현진이 귀국해 새해 인사를 왔을 때에도 그는 일부러 현자가 되지 않았다. 지난가을 월드시리즈 승리투수 요건 코앞에서 강판당하고 구원투수의 실패로 패전까지 짊어진 애제자였다. 김 전 감독은 “어쩔 수 없이 나도 감독 입장인가”하며 웃었다. 그는 “투수 교체가 패착이 됐지만, 어쩌면 지나고 나서 하는 말이다”고 말했다. 류현진은 이해하는 눈치였다 한다.

안 보이는 정답일지언정 찾으려는 노력이 왜 없었겠는가. 그는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일 때는 늘 이기다가,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이 되자 하루아침에 매번 지는 신세가 됐다. 투수를 바꿨다면, 직구가 아닌 슬라이더로 승부했다면…. 야간경기 뒤 불 꺼진 아파트에 들어가 소파에 앉으면 잘못했던 것만 생각났다. 잠시 머릿속 야구장에 빠졌다가 ‘이제 자야겠구나’ 하면, 창밖은 어느새 환해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관전평을 쓰던 시절이 내게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쌍방울 감독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살 때, 그는 선 곳마다 야구가 달리 보이는 이치를 깨달았다. 매주 월요일 낮 12시에 신문사로 팩스를 보낼 때까지 구겨진 원고지가 부지기수였다. 더그아웃 밖에서 보는 야구는 감독석에 앉아 보던 것과 또 달랐다. 김 전 감독은 지금 후배들을 보고도 “그 안에 있을 땐 못 느끼는 게 많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니 야구란 얼마나 단언하기 어려운가. 김 전 감독을 상찬하는 ‘믿음의 야구’란 말에도 양면성은 있다. 그의 야구는 9연패하던 김원형을 10번째로 내보내 마침내 선동열을 1대 0 완봉승으로 이기는 야구다. 하지만 그렇게 어린왕자가 탄생할 때까지, 다른 선수는 안 믿느냐는 비난도 감당해야 했다. 그의 야구는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잘 던지던 투수를 송구 실책 염려로 갑자기 바꾸는 야구다. 예감을 믿을 때, 누군가는 영광의 순간에서 한발 비켜서야 했다.

대가가 겁쟁이인 이유는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김 전 감독은 “세상살이도 그렇지 않느냐”고 했다. 야구뿐인가. 경륜 있는 법관들은 젊은 시절에 어찌 거침없이 판결문을 썼는지 모르겠다고, 재판이란 할수록 확신이 어렵다고 한다. 유능한 경제 전문가들은 전망치 하나를 내놓기 전 수많은 전제를 단다. 문인들이 돌려 읽는 황현산의 산문은 주저하는 문장이다. “당신이 틀렸다” 대신 “당신은 전적으로 옳진 않다”로 쓰여 있다.

그러니 세상살이가 야구와 같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겸허해져야 마땅하겠는가. 평범함은 죽음인 이 그라운드에서 우리는 서로의 아웃카운트를 먼저 위로해야 하지 않겠는가. 난민과 택시기사, 최저임금과 신재민을 바라보며 우리는 단언하는 대신 자꾸만 후회해야 옳지 않겠는가. 국민감독은 진갑용의 아내가 관중석에 있는 걸 몰랐다고 했다. 진짜 야구란 역전의 포효가 아니라, 관중석의 눈물짓던 1명을 20년이 흘러서도 떠올리는 모습 아닌가 싶었다.

이경원 경제부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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