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칼럼] 서울은 평양이 아니다



김정은 서울 방문의 성공 여부는 김정은에게 달려 있어
분단 이후 70여년 동안 북한이 저지른 일들 반성하고
‘깜짝 이벤트’보다 비핵화 의지 명확히 밝히는 게 중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위한 문재인정부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달 중순이든 연말이든 연초든 상관없으니 ‘결단’만 하시라, 그러면 보수든 진보든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게 청와대 입장이다. 경호와 시찰 등으로 인한 불편이라면 우리나라 시민들이 감내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남북 정상의 합의사항인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서울 방문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낸 여세를 밀어붙이는 모양새다. 청와대 상춘재를 대대적으로 공사하는 것도 김정은의 서울행을 염두에 둔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김정은이 우리나라에 온다면 삼청동 총리공관이 숙소가 될 것이고, 한라산 백록담에도 가고, KTX도 타고, 남산타워도 갈 것이라는 등의 시나리오들까지 나돌고 있다.

김정은의 서울 나들이가 성사된다면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분단 70여년 만에 이뤄지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첫 남한 방문이다.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분단의 벽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걸 상징할 수도 있다.

북한 지도자의 서울 방문은 김정은의 아버지도 감히 못했던 일이다. 김정일은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만났을 때 답방을 언급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아버지에 비해 김정은은 남한을 둘러보고 싶다는 욕구가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만류하는 참모들이 있겠지만 1인 독재체제라는 점에서 김정은의 의지가 확고하다면 내려올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정상국가’ 이미지를 대내외에 과시하고, 남한 내 보수세력의 반북 정서를 누그러뜨리는 등 김정은으로선 서울 방문의 장점은 적지 않다. 문재인정부는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 정착과 비핵화의 진전을 이루고, 경제난 등 국내 문제로 하락하는 지지율을 반등시키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양측 다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유념해야 할 점이 있다. 많은 의미를 갖고 있는 만큼 괄목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면 후폭풍 또한 거셀 수 있다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정은 서울 방문의 성공 여부는 김정은에게 달려 있다.

먼저 분단 이후 지금까지 북한이 저지른 일들을 반성하는 게 필요하다. 김정은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은 물론 현재의 김정은을 있게 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의 각종 대남 도발을 되새겨야 한다. 6·25전쟁, 무장공비 침투, 대통령 시해 시도, KAL기 폭파,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금강산 관광객 피살 그리고 핵·미사일 도발 등등. 입만 열면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면서도 수십년간 같은 민족인 대한민국 국민들의 생명을 얼마나 많이 앗아갔으며, 극도의 불안에 떨게 했던 때가 얼마나 많았나. 그런 만행들에 대해 머리를 조아릴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강제로 억류하고 있는 우리 국민 6명의 송환은 사죄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은 평양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김정은이 15만명이나 동원해 문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했던 건 독재국가의 수도 평양이기에 가능했던 장면이다. 그때 감격한 문 대통령은 김정은이 남측 땅을 밟으면 그에 버금가는 환영 행사를 열어주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평양이 아니다. 시민들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것부터 불가능하지만, 동원했더라도 그것이 대한민국 전체의 마음일 수는 없다. 문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김정은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환영 분위기를 극대화하기 위해 과도하게 분칠하는 건 어느 쪽에도 득이 안 된다. 김정은이 평양 집무실에서 남한을 속속들이 살펴봤을 테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다만, 김정은을 위인처럼 받들거나 ‘공산당이 좋아요’라고 외치는 극소수 철부지들과 김정은을 무조건 처벌해야 한다고 덤비는 소수의 극우세력은 앞으로 언행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

무엇보다 비핵화 의지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과연 북한이 핵을 포기할까’라는 의문이 여전하다. 김정은이 집권 이후 보여온 핵 도발에 대한 기억이 아직 뚜렷하다. 미국과의 북핵 협상은 답보 상태다. 그가 서울에 온다면 일거수일투족이 거의 생중계될 것이다. 그런데 핵 문제와 관련해 또 다시 어물쩍 넘어간다면 역사적인 서울 방문 의의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김정은, 왜 서울에 왔대?”라는 지적이 나오지 않겠나. 반면 서울 정상회담 직후 등 적절한 때 구체적인 비핵화 로드맵을 제시하고 반드시 실행하겠다고 약속한다면 박수를 받지 않을까 싶다. 두 정상이 한라산 백록담에서 환한 표정으로 손을 맞잡아 드는 ‘깜짝 이벤트’보다 훨씬 더.

김진홍 편집인 j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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