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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헐벗은 발



길거리에서 누군가의 헐벗은 발을 본 적이 있던가. 한국에서 그랬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아이의 작은 맨발은 뽀얀 흙먼지 아래 여기저기 긁힌 상처들과 어제 생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오늘 더해진 생채기 자국 투성이다. 월드비전의 구호개발 사역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방문한 캄보디아 씨엠립 인근 마을에서 지난 5일 만났던, 8세 소녀 앰의 발이다.

이 나라에선 국민 10명 중 7명이 하루 3달러가 안 되는 생활비로 먹고 산다. 불과 40여년 전 이념 때문에 300만명이 학살된 아픈 역사를 지닌 나라다. 앰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아빠는 재혼한 엄마와 함께 돈을 벌러 이웃나라 태국으로 갔다. 앰은 할머니를 돕기 위해 매일 아침 페트병을 주우러 다닌다. 맨발에 페트병 가득한 자루를 들고 있던 앰의 눈망울은 검고 맑았다. 현지 활동가가 아빠 이야기를 하자 눈동자에 잠시 슬픔이 스쳐지나갔지만 원망이나 미움이 느껴지진 않았다.

국제구호단체와 함께 개발도상국으로 취재를 갈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그들의 삶에 깊게 드리워진 가난의 풍경을 마주하는 건 늘 그렇듯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 한편에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작은, 정말 작은 정성을 보태지만 누군가를 돕는다는 행위에서 나도 모르게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곤 한다. 내가 그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다는 것이 곧 그보다 행복하다는 등식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나를 그보다 위에 올려두는 실수를 피하기 위해서다. 극소수지만 돕는다면서 차라리 안 돕느니만 못한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을 마주쳤던 불쾌한 기억도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돕다’라는 단어를 이렇게 설명한다. ‘남이 하는 일이 잘되도록 거들거나 힘을 보태다’ ‘위험한 처지나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다’. 문자적 의미만 봐도 돕는 사람이나 도움 받는 사람의 위치가 동격이 아니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세상은 은연중 ‘돕는다’는 행위를 등식이 깨진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여긴다. 내가 그 사람보다 많이 가졌으니, 그가 나보다 못한 사람이니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와 재물은 항상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흘러가는 법이고, 많이 가진 자들은 그만큼 힘을 휘둘러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도와 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돕는다고 도왔지만 오히려 돌려받은 게 많았다고. 부와 가난에 대한 세상의 설명이 늘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성경을 읽으면서 부와 부자에 대한 설명에 고개를 갸우뚱할 때가 많았다. 야고보서 5장이 대표적인데,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나오는 구절은 읽을 때마다 참 신랄하다는 느낌이 든다.

“거만하게 구는 부자들에게 말합니다. 슬퍼하며 몇 가지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그대들은 재난이 닥칠 때 눈물을 담을 양동이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대들의 돈은 썩었고, 그대들의 좋은 옷은 역겹기 그지없습니다. 그대들의 탐욕스러운 사치품은 내장에 생긴 암과 같아서 안에서부터 그대들의 생명을 파괴하고 있습니다.”(약 5:1∼2)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신학자인 자크 엘륄은 구약의 아모스와 신약의 야고보서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부와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부와 가난에 관하여’로 국내 번역된 책에서 엘륄은 “성경적 관점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거나 이점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부로 간주한다”는 데서부터 논의를 출발한다. 그는 비록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 그들에게 늘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하게’ 있진 않지만,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분이라고 말한다. 세상 속에서 ‘부의 법칙’은 사고파는 것이지만,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법칙’은 모든 것을 거저 주는 것이라고 한다.

아이의 깊은 눈망울에서, 헐벗은 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조건을 달거나 우쭐대지 말고 ‘내가 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들리는 듯하다.

김나래 종교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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