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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시평-민세진] 혁신은 정부가 하는 게 아니다



199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널드 코즈의 논문 중에 ‘경제학에서의 등대’가 있다. 이제는 많은 나라에서 사진 찍는 명소로나 남아있는 바닷가의 그 등대 말이다. 등대가 왜 저명한 학자의 논문 제목에 등장했던 것일까. 등대가 갖는 독특한 특성에 그 이유가 있다. 경제학에서 등대는 공공재의 전형적인 사례로 취급된다. 공공재는 사람들이 함께 소비하게 되는 속성을 갖는 서비스를 말한다. 등대에 불이 켜지면 근처 바다에 있는 누구나 불빛을 볼 수 있고, 불빛을 보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해서 불빛이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함께 누릴 수 있다. 대부분 많은 상품은 누군가 차지하면 다른 사람은 쓸 수 없는데, 공공재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경제학에서 보는 공공재 문제의 핵심은 아무도 공공재를 공급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다.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다면 누구도 나서서 대가를 지불하고 공공재를 사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이 사면 묻어가겠다는 무임승차 문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공공재는 결국 정부가 공급해야 한다는 당위로 이어진다. 등대는 당연히 정부가 세워야 하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코즈의 등대 논문은 이런 통념을 반박한다. 관념이나 수식이 아닌 역사적 증거를 갖고서다. 논문은 해상 대국 영국에서 등대가 어떻게 모험가적인 도전정신을 가진 기업가들에 의해 건설돼 왔는지 서술하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등대를 지은 아무개들의 분투는 소설 같은 박진감마저 자아낸다. 세계 등대 역사를 선도한 영국의 등대는 공학적 혁신으로 점철돼 있고, 이는 정부가 아닌 개인과 시장에 의해 오롯이 추진됐다는 것이 코즈가 말하고자 한 바다.

정부 개입이 적은 곳에서 혁신이 활발한 사례를 영국에서 한 가지 더 찾아보자. 세계 금융업 역사에 영국은 독보적 위상을 갖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은행업, 보험업, 증권업 모두 영국에서 가장 먼저 발달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영국에 은행법이 최초로 도입된 해가 1979년이다. 1879년이 아니라 1979년이다. 우리나라에서 은행법이 제정된 해가 1950년인데 근대적 은행이 탄생한 영국의 은행법은 1979년에 등장한 것이다. 물론 은행이 보험회사와 함께 회사법에 의해 19세기 말부터 재무 상태를 공개해야 하는 특별 취급을 받았지만, 사적 은행 전반을 규율하는 법이 1979년 제정됐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진국들의 시장 규제 역사는 사건·사고 수습의 연속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먼저 나아가는 것에는 도전과 모험이 필수이고, 돈과 명예가 그 원동력이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탐욕의 결과이든 무지의 소산이든 사회적으로 용인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치열한 논쟁을 거쳐 규제가 추가돼 왔다. 영국의 은행 규제가 의외로 늦은 것은 그 배경에 지난한 논의 과정을 깔고 있다. 때로는 그 논의 과정이 기득권층의 부당한 버티기로 얼룩질 때도 있었겠지만 궁극적으로 혁신의 동력을 훼손하지 않았기에 영국은 지금도 선진국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을 압축적으로 한 것처럼 규제의 많은 부분도 몇몇 선진국으로부터 압축적으로 수용해 왔다. 건국 이래 상당 기간 일본 법규를 기본으로 삼다가, 외환위기 이후에는 미국 법규에도 눈을 돌렸다. 물론 한국적 특수성과 고유한 경험도 고려됐지만 전반적으로 규제를 덜기보다 더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는 느낌이 든다. 중요한 것은 비교적 단기간에 규제 체제를 만들면서 마땅히 했어야 할 고민을 건너뛰고 비즈니스의 본질인 돈 벌 자유마저 간과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로머는 지식과 혁신으로 꺾이지 않는 성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지식과 혁신은 자유로운 사고에서 나오고, 자유로운 사고는 규제에 가로막히게 마련이다.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과잉 규제 불만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유다.

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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