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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권혜숙] 경계를 넘는다는 것



“휴대폰 배터리의 39%와 40%에는 경계선이 있다. 40%일 때는 여유가 있지만, 39%일 때는 걱정되기 시작한다.” “나는 내 또래의 남자사람 친구들과 경계선을 달고 산다.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언젠간 경계선이 사라져 남자사람 친구들과 놀고 싶다.”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생각하는 ‘경계선’은 이랬다. 지난 3일 폐막을 일주일 앞두고 찾아간 ‘2018 광주비엔날레’는 ‘상상된 경계들’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43개국 165명의 작가들이 출품한 300여점의 방대한 작품들 중 시선을 끈 것은 전시장의 한 면을 채우고 있는 신문들이었다. 신문이 미술작품의 매체가 되는 것도 흔치 않거니와, 무엇보다 새하얀 벽면에 붙여진 거칠고 누런 갱지들은 화려한 원색으로 존재감을 뽐내는 회화나 전시장 한 칸을 꽉 채운 거대한 설치작품들에 비해 너무 이질적이어서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본 신문 속에는 미소를 짓게 하는 기발함이 있었다. ‘14세 & 세계 & 경계’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일본 작가 시타미치 모토유키가 경계와 꿈에 대해 광주의 중학교 학생들과 워크숍을 하고, 학생들의 메모를 정리해 광주 지역신문에 같은 제목의 꼭지로 게재한 것이었다. 작가가 학생들을 참여시켜 완성한 일종의 ‘참여형 개념미술’인 셈이다. 작품은 매주 한 번씩 13주에 걸쳐 연재됐다.

그런데 왜 14세여야 했을까. 이제임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은 “어린이도 성인도 아닌 경계지점에 서 있고,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경계에 있는 나이”라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경계들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14세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졌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내 외모를 평가하게 된다. 내 진짜 모습을 잊어버리는 경계선이다.” “왜 심하게 다퉈도 가족과는 멀어질 수 없는 걸까? 가족 사이에는 어떤 경계선이 있는 걸까?” “교회에 가면 욕도 안 하고 행동을 예쁘게 하는데, 학교에 오면 욕도 많이 하고 행동도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다. 교회와 학교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는 것 같다.”

전시장의 작품 소개에는 ‘작고 작은 그들의 세계를 도대체 무엇이 가로막고 있을까요?’라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가족과 친구 외모 종교 등의 주제를 망라해 고민하고 있는 이들의 세계는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14세 학생들이 생각하는 경계가 갑과 을, 여혐과 남혐, 친북과 친미, 소득주도성장과 시장주의, 무주택자와 다주택자, 꼰대와 ‘요즘 애들’처럼 현재 우리 사회의 무수한 경계들을 다룬 기사와 나란히 한 지면에 실렸다는 게 의미심장했다.

광주비엔날레의 ‘상상된 경계들’이라는 주제는 정치사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근대 들어서 발명된 ‘상상된 공동체’라고 규정한 그의 주장을 대입한다면, 분열과 충돌, 대치를 초래하는 세상의 다양한 경계들 역시 우리의 상상이 만든 허구라고 말하는 것일까.

분단선으로 나뉜 땅에서 자라서인지, 경계는 위험하고 선을 넘는다는 건 불리하다고 배웠다. 사방치기를 하다 금을 밟으면 상대방에게 기회가 넘어가고, 책상에 그어놓은 선을 넘어가면 짝꿍과 서로 물건을 빼앗았으며, 반공 포스터를 칠하다가 윤곽선을 벗어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경계선상의 존재들인 14세들은 공고한 ‘상상된 경계들’을 넘어서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첫 해외여행으로 중국에 갔다. 처음엔 새로운 환경이 두려웠다. 하지만 현지인과 한마디 대화를 하게 되면서 두려움이 없어졌다.” “경계선은 없다. 옛날에는 피부색이 경계선이었다면 인터넷의 발달과 세계의 통합으로 그 경계선이 무너졌듯이, 이것은 차이일 뿐이다.” 소통으로 경계를 넘고, 경계란 없다고 선언하는 14세들의 의지가 야무지고 올차다.

권혜숙 문화부장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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