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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김남중] 어떤 성장인가



서울 지하철 운용사인 서울교통공사는 대규모 공공기관 중 가장 선도적으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곳이다. 그런데 정규직 전환자 1285명 중 112명이 공사 직원의 친인척이라는 조사 결과가 공개되면서 ‘특혜채용’ ‘고용세습’ 논란에 휩싸여 있다.

언론 보도와 국회 국정감사를 거치며 증폭된 서울교통공사 채용비리 의혹은 이제 감사원 감사로 넘어갔다. 숱한 의혹들이 제기됐지만 정규직 전환이나 채용 과정에서 비리가 확인된 건 아직 없다. 그렇지만 이번 논란을 겪으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라는 사회적 압력은 약화되고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기관의 정규직 전환 속도도 늦춰질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 인상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정권이 바뀐 후 최저임금 인상률은 2년 연속 10%를 넘어 내년도 8350원으로 결정됐다. 그러자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때문에 자영업자들이 폐업 위기로 내몰리고 기업이 고용을 줄인다는 주장이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인간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최소 기준이자 불평등 해소를 위한 출발점으로 여겨져 온 최저임금은 경기 악화의 주범으로 몰리고 말았다. 대통령은 2020년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고 밝혔다. 노동시간 단축 역시 위태로운 상황이다. 장시간 노동을 끝내야 한다는 오랜 요구 끝에 주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됐다. 그러나 최근 여야는 사실상 주64시간 근로가 가능한 탄력근무제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는 데 합의했다. 노동계는 다시 투쟁 모드로 들어갔다.

문재인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사회개혁 대부분이 위기에 처했다. 정권이 출범한 지 1년반이 지났을 뿐인데 개혁은 동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특히 한국형 불평등 해소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소득주도성장을 주도해온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교체를 계기로 이 정부의 경제개혁이 어디로 갈지 우려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문재인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을 내걸고 성장 대신 불평등 해결에 집중하는 경제 패러다임 전환을 추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년반을 돌아보면 북한 문제를 제외하고 가장 뜨거운 전선은 경제였다. 경제를 바꾸는 것은 정치를 바꾸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보수정권 9년의 실패로 정치에선 명분이 없다는 걸 아는 이들은 경제문제를 붙잡고 싸움을 벌였다. 그들은 경제개혁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나 오류, 일시적 퇴보 등을 부풀리고 공격하면서 전세 역전을 노린다. 정치적 진보 중에는 경제적 보수도 꽤 있다. 성장론을 신념화한 국민들도 많다. 성장론은 쉽고 명쾌하다. 게다가 경기는 어렵다. 그러니 경제 분야에선 싸움이 된다. 그러자 불평등에 대한 분노에 밀려 숨죽이고 있던 성장론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개혁의 덧없음이나 위험을 설파하는 목소리도 부쩍 커졌다. 이렇게 우리는 다시 과거의 익숙했던 ‘무조건 성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오랫동안 보통 국민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고 있다. 국민들의 삶이 국가의 발전과 같이 가야 되는데, 그게 괴리가 생겨버렸다. 국민들은 경제성장을 했다고 하는데 나하고 뭔 관계가 있나? 심지어 경제성장을 왜 해야 돼? 이런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2014년 장하성 당시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소득주도성장론의 기초가 된 ‘한국 자본주의’를 출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를 질문하며 불평등 해결을 한국 경제의 최고 우선순위로 정렬하려던 그의 실험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일까.

모든 정책은 완벽하지 않다. 개혁에는 그림자가 따르게 마련이고, 선의에서 시작된 일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좋을 수는 없다. 문제가 있다면 후속 대응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방향이다. 성장인가 불평등인가, 다시 기로에 섰다.

김남중 사회2부 차장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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