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칼럼] 저자세와 조급증이 화 부른다



리선권의 ‘냉면’ 망언 파동 점차 진정되고 있으나 잊어서는 안 돼
뜨뜻미지근하게 대응하면 대북정책에 대한 부정적 여론 높아질 것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의 ‘냉면’ 망언 파동이 정점을 지나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시간이 다소 걸리긴 했지만, 정부·여당의 ‘물타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사실관계가 불분명하다’부터 ‘단순한 농담일 것’이라거나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서 받은 엄청난 환대를 훼손하는 정도는 아니다’까지 정부·여당은 지난 2주 동안 정성을 쏟아부었다. 발언의 진위 여부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모습은 없고, 파장을 최소화하는 데 급급했다. 남북 관계를 주도하는 청와대의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김의겸 대변인, 여당 원내대표가 전면에 섰다. 지난달 29일 리선권이 내로라하는 남측 기업인들에게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네까”라고 했다는데 보고받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비슷한 이야기를 보고받았다”고 답했던 조명균 통일부 장관도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확인이 어렵다”고 말을 바꿨다.

정부 내에서 유일하게 서훈 국가정보원장 발언이 눈에 띈다. “사실이라면 가만히 있을 일은 아니며 분명히 짚어야 할 문제다.” 최소한 이런 인식을 갖고 서둘러 사실관계를 알아본 뒤 사실로 드러나면 북한에 유감을 표명하고 재발방지를 요청하는 게 순리다. 그럼에도 정부 태도는 뜨뜻미지근하다. 사실관계 확인을 작정했다면 벌써 결과가 나왔을 것이나 아직 오리무중이다. 그래서 여론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다. 여론이 잠잠해지면 대충 넘어가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법하지만 착각이다. 리선권이 남북협상장에 다시 등장하는 순간 더 큰 비난여론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통일부 장관을 겨냥해서도, 협상장을 취재하는 남측 기자에게도 면박을 주며 무례를 저지른 그의 전력이 이미 많은 국민들 머리에 각인돼 있다. 2010년엔 “한국의 천안함 발표는 모두 조작”이라고 억지를 부렸던 그다. ‘냉면 목구멍’ 발언이 사실일 개연성이 커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문재인정부의 대북 저자세와 조급증에 대한 지적은 수없이 제기됐다. 하지만 정부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가급적 북한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 되며, 북한이 원하는 것 이상의 것을 먼저 건네주자는 자세를 취해 왔다. 그래서 한반도 긴장 완화를 가져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리선권 사례에서 보듯 북한의 오만불손은 더 키웠다. 우리가 얼마나 얕보였으면 대놓고 막말을 하겠나.

한 정치인의 표현처럼 북한 지도부는 ‘동네 조폭’ 수준 아닐까 싶다. 고개를 숙이고 도와 달라고 통사정해도 모자랄 텐데, 눈을 부라리며 칼(핵)을 들고 있지도 않은 빚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폭력배. 그런 집단을 무조건 감싸는 건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북한을 위해서도 옳지 않다. 잘못된 언행을 하면 그때마다 따끔하게 질책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국민들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고, 북한을 정상국가로 이끌 수 있다. 북한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오냐오냐하며 받아주기만 하면 못된 버릇을 결코 고칠 수 없다. 북한의 못된 버릇이 도질 때마다 국민들의 굴욕감과 분노는 커질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그나마 평가를 받는 분야가 남북 관계다. 경제는 엉망이다. 정치는 불협화음의 연속이다. 다른 건 잘못해도 남북 관계만 잘하면 된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남북 관계에 대해서도 부정적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 주된 이유가 대북 저자세와 조급증 때문이다. 무엇보다 북한의 안하무인식 행태에는 정면으로 대응하는 게 필요하다.

한·미 관계와 북·미 관계에 이상이 생긴 것도 정부의 대북정책과 연관이 없지 않다. 미국은 남북 관계 속도 조절을 요구하고 있으나 정부는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면 미국도 결국 따라올 것이라는 입장이다. 미국은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정부는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면서 북·미 양측의 조속한 협상 재개를 독려하고 있다. 누가 옳은지를 떠나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와중에 인천 자유공원에선 맥아더 동상 화형식이, 서울 도심에선 김정은 찬양 집회가 각각 열리는 등 우려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야당에서 제기한 남북협력기금 비공개 예산 전용 논란도 찜찜한 대목이다.

정부가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당해졌으면 좋겠다. 북한 지도부의 막된 언행으로 인해 대한민국과 국민들의 자존심이 훼손되는 사태가 더 이상 반복돼선 안 된다.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 정착에도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리선권 파동을 계기로 정부의 대북 저자세가 바로잡히길 기대한다. 북한에 대한 분노가 정부를 향하고 있다.

편집인 j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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