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용목] 그냥 가면 돼



지난 7∼9일 광주에서는 제2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이 열렸다. ‘아시아에서 평화를 노래하자’라는 주제로 각국의 작가들이 포럼과 대담, 낭독회 등을 치렀다. 레지던시와 연계된 행사여서 나는 일주일 전부터 몇몇 아시아 작가들과 한 숙소에서 지냈다. 새삼 세계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예컨대 팔레스타인에서 온 소설가는 아랍의 여성 차별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서구에서 그것만을 부각하여 자신들 변혁의 소스로 삼고 마치 나머지 문제는 없는 것처럼 돌려세우며 식민주의를 강화하는 것을 아프게 생각했다.

장기간 머물다 보니 한 번씩 서울에 다녀와야 했다. 하루는 기차를 타기 위해 밤늦도록 이어진 행사 도중에 일어났다. 걸으면서도 이 세계의 막막한 현실이 내 앞에 놓여 있는 기분이었고 거짓과 위선이 사라진 시대는 언제일지 골몰했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정작은 내가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쪽이 지하철역인지 도통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꼭 이럴 땐 핸드폰도 배터리가 다 돼 전원이 나가 있다.

불콰하게 술이 오른 어른을 만난 것은 폐장한 대인시장을 제법 헤매고 난 뒤였다. 잴 것도 없이 나는 지하철역을 물었다. 손짓이나 눈짓을 섞었다면 충분했을 대답이지만, 어른은 조금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그냥 가면 돼” 하고는 터벅터벅 가던 길을 갔다. 워낙 무심한 말투여서 황망하게 어른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 세계도 어딘가 목적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미래로 향하는 내비게이션이 없고 선지자나 창조자에게 물을 전화 찬스도 없다. 아니, 어쩌면 정해진 길을 시키는 대로 가는 것이야말로 일상의 통제시스템 속을 살아가는 식민의 경로일지도 모른다. 거기엔 순간순간의 진실이 없다. 나는 조금 더 헤맸지만 불 꺼진 시장이 품고 있는 삶의 풍경을 좀 더 많이 만났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자리가 미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미래를 찾아 인생을 허비할지도 모른다. 그 어른도 집에 잘 도착했을 것이다.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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