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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한장희] 정권은 바꿔도 부모는 못 바꾸니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이 지난달 제출한 한국사 수행평가 과제 제목이 ‘21세기 음서제’다. 뭔가 해서 봤더니 주제 설명 항목에 “서울교통공사 채용비리가 가족과 친척에게까지 특권을 세습한 고려시대 음서제도와 유사하다”고 적어 놨다. 노파심에 “아직 의혹이지 확인된 건 아냐”라고 말해줬다.

서울교통공사의 ‘고용세습’ 비리 의혹을 규탄하는 대자보들이 대학가에 나붙었다고 한다.

“한 청년의 (구의역에서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형성된 사회적 공감대가 소수 귀족노조의 기득권 강화에 이용됐다.” “취업하려면 민주노총 부모를 둬야 합니까.”

처음엔 이런 메시지가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했다. 대자보를 붙인 대학생 단체가 보수 성향이라는 점도 선입견을 부추겼다. 그런데 온라인에 “귀족노조까지 금수저로 만드는 게 촛불혁명이냐”는 글이 심심찮게 보인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연일 공기업 고용세습을 비판하는 청원이 올라오고 있다.

물론 서울교통공사 고용세습은 여전히 의혹 사안이다. 정규직으로 전환된 무기계약직 1285명 중 기존 공사 직원의 친인척은 112명. 논란이 된 건 구의역 사고가 발생한 2016년 5월 이후 채용된 77명 중 공개 채용을 통해 들어온 38명이다. 이들이 정규직 전환 방침을 내부자인 가족 등을 통해 미리 듣고 지원했는지가 쟁점이다. 자유한국당은 ‘권력형 채용비리 게이트’라고 공격했고, 여당과 서울시 측은 ‘팩트가 틀린 정치공세’라고 반박했다. 서울교통공사 노조는 고용세습 비리 의혹을 제기한 일부 보도가 ‘가짜 뉴스’라며 법적대응에 나선 상황이다.

하지만 취업준비생들은 의혹만으로도 이미 ‘멘붕’ 상태다. 정규직 전환 방침을 밝힌 후 무기계약직 채용은 없었다는 서울시의 해명보다 ‘가족을 통해 내부 정보를 미리 입수해 비교적 입사가 쉬운 무기계약직으로 들어간 뒤 정규직 전환의 수혜자가 되었다’는 한국당 주장에 더 수긍하는 모양새다. 많은 취준생들이 SNS에 ‘입사세습’을 단협을 통해 관철시킨 일부 대기업 노조에 이어 공기업 직원들마저 고용세습을 자행했다는 의혹을 놓고 배신감과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 “공정할 것이라 믿었던 공기업도 실력보다 부모나 친인척을 잘둔 게 먼저였다”며 좌절했다고 밝힌 이도 있다.

2년 전 “돈도 실력이야,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 원망해”라는 정유라의 SNS 글을 보고 많은 젊은이들이 광장으로 뛰어나왔다. 국가권력을 사익추구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특권과 반칙에 항의하기 위해 촛불을 들었다. 촛불혁명은 정권을 무너뜨렸고 이후 ‘공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눈높이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높아졌다.

심각한 것은 많은 취준생들이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공기업 고용세습 의혹을 접한 뒤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권이 교체됐어도 여전히 자신들은 영화 설국열차에 나온 ‘꼬리칸’에 타고 있고, 재벌이나 있을 법한 ‘앞칸’에 공기업 직원과 대기업 노조까지 들어가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고 있지 않냐는 생각이다.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인간은 역사에서 배운다’는 헤겔의 말은 옳다”면서도 “인간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운다”고 독설을 날렸다. 그의 말처럼 현 정권이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촛불혁명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고교생 아들도 과제물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취업비리(의혹)가 터졌습니다. 과연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다고 생각할까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정감사에서 “민주노총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노조와 거리를 두는 발언을 했다. 서울시는 자진해서 감사원에 감사를 요청했다. 결과를 두고 볼 일이다.

한장희 사회부장 jh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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