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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손수호] ‘행복’과 ‘희망’을 남용하면…



올해 3월 2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엘시티 공사현장에서 55층 외벽의 안전작업 발판(SWC·Safety Working Case)이 160m 아래 지상으로 떨어졌다. 이 사고로 구조물에서 작업 중이던 근로자 3명이 숨졌다. SWC를 지지하는 기계장치가 고장 난 것이다. 그때 구조물에 적힌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함께 만드는 행복’. 공사를 둘러싼 비리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동안 노동자는 위험 속에서 묵묵히 행복을 만들고 있었다.

올 상반기 건설현장에서 추락해 사망한 이는 107명에 이른다. 이 중 31명은 높은 곳에 설치된 비계에서 사고를 당했다. 그렇게 행복은 안전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공사현장에서 이런 글도 보았다. “공사 관계자 여러분, 일단 사고가 나면 당신의 부인 옆에 다른 남자가 자고 있고, 그놈이 아이들을 두드려 패며 당신의 사고보상금을 써 없애는 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글 아래에 대형 건설회사의 로고가 붙어 있었다.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라는 급훈보다 비윤리적이다.

최근 서울 둘레길에 갔더니 ‘행복은 삶의 습관입니다’라는 장방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하루에 다섯 번 감사를 표합니다’ ‘매일 나와 이웃을 한 번 이상 칭찬합니다’ ‘비교하지 않고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삽니다’ 등 행복에 이르는 10가지 수칙을 적어놓았다. 구청의 공원녹지과에서 산길 곳곳에 붙여 놓았다. 이 십계명을 지키면 행복할까. 거꾸로 이러한 삶을 살지 않으면 불행한 걸까. 지자체가 주민복지를 위해 애쓰는 것은 좋지만 행복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영역이어서 정책의 목표로 삼기가 어렵다.

‘행복’만큼 수난을 당하는 말이 ‘희망’이다. 본래 가혹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꿈을 놓치지 않도록 사용한 말이다. 재소자 교육 프로그램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다가 나라가 외환위기로 미증유의 위기에 빠졌을 때 미디어에서 집중적으로 전파했다. 서로 부축하며 국가 부도 사태를 하루빨리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애용된 것이다. 이후 상황이나 조건과 관계없이 많은 캠페인의 접두어로 쓰이면서 생활용어로 탈바꿈했다. 젊은이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에는 단골이다. 어떤 지자체에서는 ‘희망 ○○’ 식으로 구정의 목표로 삼기도 한다.

기실 행복과 희망은 그렇게 함부로 운위해서는 안 된다. 산마루에 있는 것 같아 오르면 바다 쪽으로 사라지고, 바다에 다다르면 다시 운무 속에 숨는, 그런 불가촉의 은밀한 대상이다. 인사를 잘하고 칭찬한다고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조금씩 형성돼 지극히 고귀한 상태에 이르는 여정이다. 만족, 즐거움, 기쁨, 충족이 다 모여도 행복을 채울 수 없다. 가능성, 기대, 소원, 소망을 망라해도 희망봉을 이루지 못한다. 마음에 두면서 추구하는 것이지 달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신기루에 홀린다. 행복과 희망을 대량으로 실어 나르는 수단 중에 가장 딱한 것이 도시의 글판이다. 작가들의 책에서 쏙 빼온 미문(美文)이 광화문과 시청, 남산기슭과 공덕로터리에서 경합한다. 문학이 도매금으로 소비되는 순간 예술의 향취는 점차 사라진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붙은 시가 그렇듯 좋은 글도 반복하면 스트레스다. 행복과 희망가를 매일 울리면 건전가요보다 못하다. 시민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려는 계몽주의적 시도는 피로감을 낳는다. 교양은 스스로 쌓는 것이지 공짜 이모티콘처럼 뿌려지는 것이 아니다.

곧 연말이다. 한 해를 정리하는 지점에 행복과 희망의 메시지가 홍수를 이룰 것이다. 충만한가, 공허한가. 맨입으로 행복을 비는 것은 행복지수 1위라는 부탄 국민의 일상처럼 터무니없다. 막연히 희망을 잃지 말라고 하는 것은 공사장의 ‘안전제일’ 표어만큼 진부하고 지루하다. 사람들이 행복과 희망이라는 말에 식상해지면 그 자체가 불행이고 절망이다. 그 이상의 경지는 없기 때문이다.

손수호 (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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