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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맹경환] 악플을 무덤까지 갖고 갈 텐가



누구나 남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다. 본인의 치부일 수도 있고, 공개될 경우 많은 이들을 다치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일 수도 있다. 디지털 시대인 요즘, 그런 비밀들은 영상이든 문서든 파일 형태로 노트북이나 태블릿, 스마트폰에 보관돼 있다. 혹시 남의 눈에 띌까 봐 비밀번호를 걸고 비밀 공간에 모셔두곤 한다. 하지만 ‘죽은 뒤 혹시 세상에 알려진다면…’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지난여름 일본 아사히TV에서 방영된 드라마 ‘디리’는 이런 사람들의 불안을 모티브로 했다. 이야기는 사망한 사람들이 생전에 남긴 디지털 유품들을 삭제해 주는 업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디리는 ‘딜리트(delete·삭제)’를 의미하고 회사 이름(dele.life)이기도 하다.

디리는 일종의 디지털 장의사다. 계약에 따라 노트북이나 스마트 기기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신호가 오지 않으면 요청한 폴더의 파일들을 지우도록 돼 있다. 우선은 의뢰인의 실제 사망 여부를 확인해야 하고, 그다음 해킹 기술을 동원해 원격으로 삭제 실행에 옮긴다. 현실이라면 그렇게 의뢰인들의 디지털 유품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8부작을 이끌고 가야 하는 드라마다 보니 단순히 삭제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저마다 사연은 있고 의뢰인들의 크고 작은 비밀이 드러나면서 갖가지 저항에 부닥친다.

일본에는 오래전부터 디지털 흔적을 말끔하게 청소해주는 디지털 장의사들이 호황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이미 한국고용정보원은 2016년 기존 주요 직업 196개 외에 5년 내 부상할 신직업으로 37개를 꼽았는데 그중 디지털 장의사가 포함되기도 했다.

디지털 장의사는 원래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온라인상에서 남긴 흔적을 지우는 게 주된 임무였다. 하지만 요즘은 생존해 있는 사람이 인터넷상에서 원치 않는 기록이나 지우고 싶은 사진 또는 영상을 정리해주는 일로 업무가 확장됐다. 과거 철없던 시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썼던 ‘악플(악성 댓글)’을 삭제해 달라는 요청도 많다고 한다. 피해자들이 나서서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며 영상이나 댓글에 대해 삭제 요청을 하는 경우도 많다.

악성 댓글의 심각성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 ‘김포 맘카페 사건’이 대표적이다. 경기도 김포 지역의 한 맘카페에서 아동 학대 가해자로 몰린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악성 댓글과 신상털이를 당한 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처음 문제의 맘카페에 학대 장면을 목격했다는 사람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여기에 학대당한 아이의 이모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추가로 게시물을 올리면서 댓글도 경쟁이 붙다 보니 더 자극적이 되고 공격적으로 변했다. 많은 사람은 SNS나 커뮤니티 등 인터넷 공간을 사적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책임을 동반해야 하는 공론의 장이라는 점이 잊히고 온갖 감정의 ‘배설’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악성 댓글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 신년기자회견에서 지지자들의 ‘격한 표현의 안 좋은 댓글’과 관련한 한 질문을 받았다. 문 대통령은 “담담하게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예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면서 “유권자인 국민의 의사표시라고 받아들인다”고 답했다. 댓글 규제보다는 표현의 자유에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날 “(악플을 다는) 지지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던 기자는 온갖 악플로 다시 한번 곤욕을 치렀다.

당분간은, 쉽지 않겠지만 온라인의 자정 능력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과거에는 생존자들의 기억 속에 남은 평판뿐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죽은 뒤에도 온갖 디지털 흔적이 온라인 공간을 떠돌 것이다. 남은 가족들이 디지털 장의사를 찾아 헤맬 수도 있다. 그동안 썼던 댓글들이 ‘묘비’를 장식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맹경환 온라인뉴스부장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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