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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포럼-이재열] 남북관계의 맥과 혈



우리가 노려야 할 北의 혈은
한반도 주변국 이해관계를 하나로 묶되
北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빈틈이다
이 혈을 제대로 누르지 못한 햇볕정책을 타산지석 삼고
임기 내 성과주의 등 4가지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막다른 골목에 처했던 북한 비핵화 협상은 3차 남북 정상회담으로 다시 활력을 찾은 듯하다. 주역은 문재인 대통령. 멀어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다시 대화의 자리로 끌어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략적 선택을 강조하는 실체론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그러나 최고 의사결정권자들의 전략적 선택 이면에는 변화하는 관계의 맥(脈)이 존재한다. 그래서 제대로 혈(穴)을 눌렀는지 관계론적으로 따질 필요가 있다.

남북 관계의 맥을 알려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를 삼자관계로 읽어내는 기하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내 친구의 친구가 나와 친구면 삼자관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지만, 내 친구의 친구와 내가 싸우면 나와 친구의 관계도 불안해진다. 내 친구의 적이 나와 적이면 나와 친구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진다. 복잡한 관계의 기하학 속에서 맥을 짚고, 혈을 제대로 눌러야 남북 관계 개선도 가능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를 삼자관계로 인수분해해보면 높은 불안정성이 두드러진다. 게다가 군사 경제 역사의 관계가 서로 충돌한다. ‘북·중혈맹’의 과거와 ‘한·미동맹’의 현재가 사드 배치에 따른 한·중 갈등의 맥락이다. 북핵을 둘러싼 한·미·일의 안보위협 공유에도 한·일 군사보호협정에 격한 저항이 생긴 맥락은 역사적 피해의식, 즉 독도 문제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민족적 공분 때문이다. 미·중 무역분쟁은 양국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는 커다란 위협 요인이지만 북한엔 중국을 끌어들일 호재다. 남북 관계에서 우리가 노릴 혈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를 공통으로 묶되 북한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빈틈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지 마련은 쉽지 않다. 우리 내부의 격렬한 이념 갈등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좌·우파의 생각이 그만큼 다르다. 첫째, 위로부터의 시각과 아래로부터의 시각이 충돌한다. 평양 5·1경기장 대집단체조 이후 15만 평양시민 앞에서 한 문 대통령 연설에 감동하는 이들은 최고지도자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북한을 위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밑으로부터의 시각에서 보면 대규모 매스게임 참가자를 생리현상조차 무시하고 동원하는 전체주의 국가의 폭력성이 더 주목받는다.

둘째는 내재적 관점과 외재적 관점 간 갈등이다. 북한의 고립과 민족 정서, 핵 개발 필요성에 대한 공감을 넘어 ‘백두혈통’의 정당성에 동조하는 내재적 관점은 국제적 보편 규범과 멀어진 북한을 심각한 인권유린, 전제정치, 그리고 국제통상 규범이 통하지 않는 갈라파고스화한 섬으로 보는 외재적 관점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현재 집권층은 위로부터 보는 내재적 시각에 친화적이다. 반면에 우파나 미국 조야, 그리고 아셈회의에서 드러난 서구 정상들은 아래로부터 보는 외재적 시각에 더 가깝다. 북한의 혈은 경제, 즉 실질적 시장 확대의 혜택으로 다시는 배급경제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주민들의 기대 상승이다. 남북 간 신뢰가 중요하지만 핵 폐기에는 검증 가능한 비가역적 절차가 따라야 한다. 그런데 비핵화를 위해서는 경제 제재가 필수적이라는 국제적 합의에 반해 문재인정부의 남북 경협 주장은 너무 앞서 있다.

여기서 햇볕정책의 공과를 복기할 필요가 있다. 북한을 보통국가로 이끈다는 정책 목표에 동의하는 이가 많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2002년 이미자 공연을 필두로 방송사 간 경쟁적 평양 공연이 이어졌고, 현대의 금강산 진출은 기업의 경쟁적 북한 진출을 자극했다. 그러나 노동당으로 통하는 일관된 창구를 유지한 북한과의 교섭에서 자유시장 경쟁에 익숙한 남측 기관은 이이제이(以夷制夷) 당했다. 퍼주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경쟁적으로 퍼주고서 북한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 것이 진짜 문제였다. 북한의 변화를 끌어낼 지렛대를 갖추지 못하고 개장했다가 국제무역 규범과 재산권에 관한 개념을 심어주지 못하고 북측의 일방적 요구에 휘둘리다 돌발적으로 철수한 개성공단도 마찬가지다.

남북 관계 개선의 목표는 70년간 이질화된 남북 간 이념, 관계, 인프라에서의 호환성을 높여 북한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보통국가로 만드는 것. 과거 어느 때보다 남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커졌다. 그런데 조심할 점은 조급한 임기 내 성과주의, 민족이나 경제, 그리고 안보 중 한 가지 이슈에만 집중하는 편협성, 김정은의 스타일 변신에 반색하는 희망적 사고, 그리고 정파적 이익에 따른 내부갈등이다. 냉정하게 함께 지혜를 모아 맥을 짚고 제대로 북한의 혈을 누르지 못하면 또다시 실패한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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