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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한승주] 오늘을 행복하게



팔순의 아버지가 얼마 전 재활병원에 입원했다. 아버지는 4인실에 계시는데 나머지 세 병상은 내 예상과 달리 모두 젊은 환자들이다. 열아홉, 스물하나 그리고 서른 살. 이들은 모두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하반신 마비 환자. 꽃다운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걷지 못하게 됐다. 다리뿐 아니라 팔도 마음대로 안 움직이고 말이 어눌한 이도 있다. 세상이 몇 번은 무너졌을 이들이 이제는 재활치료를 기다리는 동안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장난도 친다. 이만하기도 다행이라는 듯 미소도 짓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본인과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감히 상상조차 안 된다.

그 병원 복도에선 아주 느리지만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었다. 한 번은 젊은 여성이 30분 정도 한자리에 서서 앞으로 막 한 걸음을 떼려는 순간을 목격했다. 바로 뒤에는 남편이 혹여 아내가 넘어질까 숨죽이며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아내는 아주 느리고 아주 힘들게 겨우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일주일 후, 다시 같은 복도에서 본 그 여성은 예전보다 한결 빨리 걸음을 떼었는데 그 전을 돌이켜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소중한지조차 몰랐던 한 걸음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겐 삶의 목표이자 희망인 것이다.

가벼운 뇌경색으로 오른손이 불편해진 아버지를 보면서 사람이 손을 꽉 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느낀다. 그 손으로 연필을 잡고 글을 쓰고, 숟가락을 쥐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 하루하루의 기도 제목이다. 두 다리로 걷고, 떠오르는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고, 팔로 무언가를 잡고 쓸 수 있음은 축복이다. 아버지를 간병하는 어머니는 “나이 칠십이 넘어 이곳에서 인생 공부 제대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당신이 걸을 수 있다면 많이 걷자. 무언가를 집고 쓸 수 있다면 생각이 달아나기 전에 많이 쓰고 정리하자. 불평하기보다는 이미 가진 것에 감사하자. 만약 크게 아픈 데 없고 넉넉하지는 않아도 엄청 쪼들리는 것도 아니라면, 산책하고 바람을 쐬면서 이 좋은 계절을 만끽하자. 나를 위한 소소한 행복도 챙기면서 그렇게 살자.

특히 일상의 행복을 위해 지갑을 여는 데 인색하지 말자. 지난해 암 투병 중이던 선배 병문안을 갔을 때다. 종합병원 특실에 입원한 선배는 “여기 하루 입원비가 얼마인 줄 아느냐. 무려 35만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건강할 때는 1박에 35만원하는 호텔에 묵을 엄두도 못 냈는데 아프고 나니 다른 선택이 없다”고 말했다.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 앞에서 왜 건강할 때, 사랑하는 가족과 여행 다닐 수 있을 때 돈을 쓰면서 살지 못했는지 후회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선배는 떠났다.

최근 비슷한 얘기를 또 들었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오래전 미국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다. 꿈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질문에 당시 기업에 다니던 정 전 의장은 “앞으로 정치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르신의 꿈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지갑에서 1달러를 꺼내며 “죽을 때 1달러만 남기고 가고 싶네”라고 했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만 말고 주위를 둘러보며 나를 위해 이웃을 위해 인생을 즐기라는 교훈일 것이다.

돈이 많아야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밥 사고 커피 사고 얘기를 나누며 추억을 만들자는 것이다. 흔한 말이지만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 몇 년 후엔 여행을 가도 지금보다 체력적으로 힘들다. 다닐 수 있을 때 다니자. 오늘을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자.

몰두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좀 걸으며 하늘을 보자. 여행도 좋고 가벼운 산책도 좋다. 어떤 목표를 향해 돌진하느라 하늘이 파란 것도 단풍이 붉게 물든 것도, 아이들이 예쁘게 자라고 있는 것도 보지 못한다면 정말 슬픈 일이니까. 행복한 오늘이 모여 행복한 인생이 된다. 그러니 오늘을 행복하게!

한승주 편집국 부국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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