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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에서] 다시 돌아온 ‘실종의 시대’



구레나룻 탐스럽게 기르고 선하게 웃는 이 남자, 그동안 이미지 좋았다. 이슬람 중에서도 강경 보수로 악명 높은 사막의 신정국가에 등장한 33세 젊은 왕자. 수천년 동안 여성을 묶어온 족쇄를 푸는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그동안 금지하던 여성 운전을 허용하고, 남녀부동석(男女不同席)의 전통을 깨고 남녀가 섞여 앉아 보는 콘서트도 열었다.

근데 잘생긴 이 남자의 이미지에 피 냄새나는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이오시프 스탈린이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지난해 6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로 부상한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다.

지난 2일 터키 이스탄불에 위치한 사우디 총영사관에 갔다가 사라진 유명 사우디 기자 자말 카슈끄지 사건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터키 정부가 사건 직후 그가 영사관 내에서 살해됐다고 밝힌 가운데 사우디 왕실이 배후에 있다는 증거가 잇따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 정보기관 보고서를 인용,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이번 작전을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사건 당일 이스탄불로 급파된 15명의 사우디 요원들은 카슈끄지의 신체까지 훼손했다. 2010년 유력 일간지에서 쫓겨난 뒤 서방을 떠돌며 고국의 독재를 고발해 온 카슈끄지는 사우디 왕가에 눈엣가시였다. 카슈끄지의 피살은 사우디 절대 왕정이 비판자를 억압하는 데 얼마나 집요하고 뻔뻔한지 보여준다. 국경도 전혀 제약이 아니었다. 구소련의 스탈린이 멕시코에까지 암살자를 보내 숙적 레온 트로츠키를 살해한 것을 연상시킨다.

반대파에 대한 물불 가리지 않는 탄압을 얘기할 때 중국 정부를 빼놓을 수 없다.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의 첫 중국 출신 총재인 멍훙웨이(孟宏偉) 실종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멍 전 총재는 지난달 25일 “모국으로 출장 간다”고 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 열흘 뒤 멍 총채 부인이 기자회견을 통해 남편의 실종 사실을 알린 뒤에야 중국 공안부는 “멍 전 총재가 뇌물수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확인했다. 홍콩 언론들은 멍 총재 실종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공안 물갈이’의 완성판이라고 평가한다.

사실 시 주석은 상습적인 납치자다. 2012년 주석 취임 이후 홍콩의 이름 없는 출판업자부터 유명 기업인·배우에 이르기까지 소리 없이 사라지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한참 뒤 풀려난 그들은 중국 정부와 공산당에 대해 실종 전과는 180도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중국 최고스타 판빙빙도 그랬다. 석 달 이상 행방이 묘연해 사망설까지 돌았던 그녀는 지난 8일 “저를 키워준 국가, 사회와 팬을 저버렸다”며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국가에 의한 실종은 러시아에서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러시아 정부는 심지어 외국에서도 반대자에 대한 응징을 서슴지 않는다. 지난 3월 영국으로 망명한 전 러시아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 부녀에 대한 신경가스 공격이 대표적이다.

1970, 80년대 아르헨티나와 칠레 군사정부에서 구소련 스탈린의 철권통치까지 국가에 의한 시민 실종은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그 흑역사가 21세기 초반에 다시 회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래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던 인권과 도덕성을 강조하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유럽과 미국 등 민주주의 대표국에서 민주적 가치가 힘을 잃는 것도 권위주의 정권을 ‘대담하게’ 했을 것이다.

배병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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