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칼럼] 깜짝 이벤트보다 내실 기할 때다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 무르익고 있지만 아직 가야 할 길 많이 남아
핵 없는 항구적 평화 위해 보여주기식 쇼 자제하고
핵폐기 로드맵 마련에 정성과 노력 더 쏟아부어야


생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선 안 될 것, 하지만 언제든 어디서든 자유롭게 접하는 것, 그래서 그다지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 공기(空氣)다. 이따금 공기의 존재 자체를 잊기도 한다. 그러다 미세먼지 등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이 발생하면 맑은 공기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평화도 마찬가지다.

올 초부터 한반도를 감싸기 시작한 평화의 기운이 점점 무르익고 있다. 어느새 ‘평화의 일상화’란 표현이 적합할 정도가 됐다. 평화를 넘어 남북 경제통일까지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북한의 도발로 인한 긴장감은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남북 정상의 9·19 평양선언도 크게 기여했다. 선언 발표 뒤 ‘전쟁 없는 한반도’가 시작됐다는 문재인 대통령 발언에 공감한다. 육상과 해상, 공중을 포함한 모든 공간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금지하고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 시범철수를 비롯한 DMZ의 평화지대화 방안 등이 담긴 군사분야 합의서 채택은 전쟁 없는 한반도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 징표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재래식 무기로 인한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두를 일은 아니다. 한·미 공조의 틈새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고,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우리만 안보태세를 너무 약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를 새겨들어야 한다. 안보가 무너지면 나라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항구적 평화를 향한 행보는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답보상태에 빠졌던 비핵화 협상이 정상을 되찾은 점이 긍정적이다. 뉴욕과 빈에서는 북·미간 실무접촉이 진행 중이고,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이달 초쯤 방북해 2차 북·미 정상회담 의제와 일정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비핵화 시계가 빨라지면서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전제로 종전선언은 물론 양국의 예술공연단 교류와 연락사무소 설치, 경제시찰단 교환 방문 등의 후속조치들이 벌써부터 회자되고 있다. 종착점은 북·미 국교수립이다. 수교가 되면 동북아 질서가 새롭게 재편될 것이고,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도 가능할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까.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1차 임기(2021년) 내에 될 수도 있고, 10년 후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걸릴지도 모른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고, 고비도 적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최대 난제는 역시 북핵이다. 김정은이 과연 핵을 포기할지부터 여전히 불투명하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고 강조하지만,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처럼 살라미 전술을 구사하며 실익을 극대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왔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종전선언을 해주면 요만큼 핵 시설을 파괴할게, 대북제재 수위를 한 단계 낮춰주면 요만큼 핵 사찰 받을게, 핵무기 반출을 원한다면 먼저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하고 체제 안전도 보장해야지, 이런 식이다. 자신이 요구하는 것들을 들어주면 핵을 팔 수 있다는 자세는 엿보이는데, 완전히 다 팔겠다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미국이 핵을 사겠다고 제시한 가격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여하튼 그의 전략적 모호성은 일정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협상 초기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빠른 시일 내에 일괄타결로 북핵 문제가 풀릴 것이란 전망이 적지 않았지만, 요즘은 김정은이 주장한 단계적·동시적 조치가 대세다. 대북 제재엔 구멍이 뚫리고 있다.

북핵 문제가 장기전에 접어든 듯한 형국이다. 이런 때일수록 비핵화라는 본질에 더 주력해야 한다. 김정은이 핵무기 폐기 로드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도록 유도하는 데 외교력을 집중해야 한다. 말만으로는 아무 것도 담보할 수 없다. 김정은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테이블에 올려놓고 끈질기게 협상해 접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문재인정부가 이제부터 깜짝 이벤트는 자제했으면 한다. 깜짝 이벤트에 쏟을 정성과 노력을 비핵화에 쏟는다면 알찬 결과물을 이른 시일 내에 도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정은이 쓸데없는 기대감을 갖지 않도록 언행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가 그토록 집착하는 종전선언과 관련해 ‘일단 종전선언을 한 뒤 비핵화 약속을 어기면 취소하면 된다’는 언급은 바람직하지 않다. ‘김정은이 솔직 담백한 인물이며 핵을 버리고 경제 발전을 통해 북한 주민들을 더 잘 살게 하겠다는 전략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등 김정은을 칭송하는 듯한 언급도 삼가길 바란다. 내실을 기할 때다.

편집인 j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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