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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에서] 레지스탕스의 적



중절모를 쓰고 양복을 걸친 남장 여인이 담을 넘는다. 긴 저격용 총이 작은 체구를 더욱 작게 만든다. 그런 여인이 일제의 앞잡이 외무대신의 침실로 들어가 격렬히 반항하는 그를 가차 없이 사살한다. 역사와 백성의 이름으로 민족 반역자를 처단했을 것이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여주인공 고애신(김태리). 한복 차림의 고애신은 양반집의 가녀린 아씨이지만 총만 잡으면 특공대원을 방불케 한다.

고애신과 동지들은 총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사살하는가 하면 일본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고 갇혀 있는 동지들을 구출한다.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행동은 구한말 레지스탕스를 떠올리게 한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펼친 우리의 투사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포함해 외침이 있을 때마다 들불처럼 일어난 민초들의 저항운동은 넓은 의미의 한국판 레지스탕스다. 돌아보면 구국의 의병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건재한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레지스탕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즘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을 가리킨다. 나치스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폴란드 소련 등 각국에서 전개됐다. 프랑스의 항거가 가장 눈에 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1940년 6월 영국 런던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불길이 꺼져 없어져서는 안 되며, 꺼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호소한 드골 소장(少將)이 이끌었다. ‘싸우는 프랑스’의 기치 아래 주요 세력을 중심으로 ‘전국저항평의회’가 결성됐다. 그 과정을 드골이 주도했다. 저항운동에 가담한 프랑스인은 10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을 신호탄으로 국민적인 무장봉기에 들어갔다. 이들의 혁혁한 공로는 독일군의 패망에 크게 일조했다. 그해 9월 드골의 프랑스공화국 임시정부가 파리에 수립됐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티토가 레지스탕스 2개 정파를 통합해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섰다. 티토는 총리를 거쳐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레지스탕스문학도 생겨났다. 작가들은 해외나 프랑스에 머물며 전쟁의 고통, 패전의 슬픔을 노래하다가 반(反) 나치스 저항과 국민의 정치 참여를 촉구하는 작품을 쏟아냈다. 생텍쥐페리, 장 폴 사르트르 등도 레지스탕스문학 계보에 이름을 올렸다.

레지스탕스 소재의 영화도 많다. 프랑스 국보급 미술품의 국외 반출을 꾀하는 독일 점령군에 맞선 철도원들의 투쟁을 그린 ‘대열차 작전’(1964), 체코 프라하의 학살자로 불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을 다룬 ‘새벽의 7人’(1975), 추락한 미군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한 ‘레지스탕스’(2003년) 등이 유명하다. 국산 영화로는 ‘밀정’ ‘암살’이 관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내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지난 6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종로구 서울극장에서 ‘저항의 기억, 저항의 영화’라는 주제로 ‘2018 레지스탕스 영화제’가 열린 것은 저항의 아이콘 한민족에게 의미가 있다.

미국 정가를 발칵 뒤집은 레지스탕스가 화제에 올랐다. 대개 레지스탕스가 외적에 초점을 맞췄다면 미국 레지스탕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겨냥했다. 히틀러를 암살하고 나치 정부 전복을 노리는 독일 저항 세력을 그린 영화 ‘작전명 발키리’(2008)도 내부의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미국 레지스탕스는 트럼프를 내부의 적으로 선언한 셈이다.

염성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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