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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칼럼] 왜 새로운 국가 전략을 짜야 하나



역사에선 종종 외부의 패권 질서 변화로 나라 운명이 갈리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그 갈림길에 서 있다.
한국이 의지했던 미국의 세계전략이 변하는데
우리만 이념과 낭만의 우물 속에 갇힌 것 아닌가


역사에는 종종 위험한 갈림길이 나타난다. 외부의 패권 질서 변화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천당과 지옥으로 갈리는 길이다. 우리는 근대사에서 그런 큰 갈림길을 두 번 만났다. 구한말이 첫 번째였다. 당시 조정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고, 자강에 무기력했다. 일본이 세계질서의 대변화를 간파하고 안으로 체제 혁신을, 밖으로 패권 경쟁의 틈새 전략을 통해 망국이 아닌 강국의 길을 간 것과 너무 대조적이다. 나라는 열강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 패권국 영국과 신흥 강국 미국을 활용한 일본의 전략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갔다. 두 번째는 해방 후다. 그때는 소련과 함께하는 공산진영의 길이냐, 미국과 함께하는 자유진영의 길이냐의 갈림길이었다. 당시 상황은 안팎으로 전자에게 유리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전쟁까지 이겨내면서 나라가 지켜져 오늘의 성취를 이루었다. 만일 그때 삐끗했으면 우리는 지금 모두 공산체제에 살고 있을 것이다.

요즘 세계 정세를 보면 세 번째 갈림길이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위험 수준은 과거 두 번보다는 약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크게 요동칠 패권 질서 변화가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외양상 미·중 패권 경쟁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지난 70년을 이끌었던 ‘상호의존적 다자주의’ 체제의 균열과 미국의 신패권체제 추진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역사상 다른 패권국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전략을 보여줬다. 독일과 일본에 배상금을 요구하기는커녕 군사적 힘만 빼고 경제적으로는 지원책을 썼다.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해 방어선을 치면서 브레튼우즈 체제와 마셜 플랜을 통해 자신들의 동맹들이 대양을 자유로이 항해하면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안전을 보장했다. 패권 경쟁에 나섰던 나라들은 미국의 우산 아래 군사적 경쟁 대신 경제 번영의 길을 택했다. 미국은 동맹국들과 함께 자유경제 질서를 지키고 확장하는 것이 비용이 크더라도 미국을 위해 옳은 선택이라는 전략을 견지했다. 그 결과도 좋았다. 결국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시장경제로 통합됐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미국은 영토적 지배 없이 동맹국들을 함께 번영으로 이끄는 최초의 패권국가가 됐다.

요즘 미국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미국 경제는 여전히 최강이다. 세계 500대 기업 중 132개, 50대 혁신기업 중 절반이 미국 기업이다. 향후 300년간 에너지 걱정을 없게 해준 셰일가스는 미국을 달라지게 했다. 미국과 그 동맹들에 안정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는 데 매달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모든 주요국들이 맞고 있는 고령화사회의 충격을 미국만은 비켜가고 있다. 앞으로 50년간 미국만이 고령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내수가 70%를 넘는 경제에서 자원 문제와 인구 문제 없고, 금융 신기술 인재, 그리고 군사력도 압도적 우위에 있으니 ‘위대한 미국 어게인’을 외치는 그들의 자신감이 이해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미국은 세계 전략 모델을 바꾸고 있다.

2017년 말 국가안보 전략 보고서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은 ‘미국 우선주의’를 내거는 도널드 트럼프 식의 장사꾼 스타일 보고서라 폄하했다. 때문에 ‘지정학이 돌아왔다’는 선언은 귓등으로 흘렸다. 좌충우돌하는 트럼프 스타일 때문에 정작 심층적 지각 변동의 담론을 가벼이 취급한 것이다. 미국은 분명 달라졌다. 좀 손해를 보더라도 아우들을 챙기는 관대한 형의 모습에서 자기 것 확실히 챙기는 사나운 동네 아저씨로 변모한 것이다. 이상주의보다는 현실주의를, 국제주의보다는 국가주의를, 안정보다는 이익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를 뛰어넘어 구조적 현실적 힘들에 의해 강제된다고 봐야 한다.

지난 70년 대한민국의 성취는 미국의 세계 전략에 편승해 이뤄졌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만만치 않을 것이다. 패권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미국의 중국 손보기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한반도를 과거의 관성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다. 북한에 대해서든 한국에 대해서든 미국이 표변할 가능성은 훨씬 커졌다. 비핵화와 공동 번영이라는 꽃길과 비핵화 실패와 이에 대한 엄혹한 책임 추궁의 가시밭길을 두고 한반도 정세는 요동칠 것이다. 이 와중에 미국, 중국, 북한, 일본은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와 압박으로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할 수 있다. 자칫 사면초가가 되고, 안보는 풍전등화가 될 수 있다. 이에 대비한 긴 호흡의 슬기로운 새 국가 전략이 절실하다. 지금 그런 국가 전략을 세우려고 노력은 하고 있을까? 관성적 이념과 낭만적 열정만 앞세우는 우물 안 개구리 모습은 아닌가? 모두가 되돌아볼 일이다.

동아대 교수·전 국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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