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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민태원] 자해가 놀이라니



팔뚝에 선혈이 낭자하다. 손목 안쪽에는 수십 개의 베인 상처가 바코드처럼 죽죽 그어져 있다. 바닥에도 피가 흥건하다. 범죄 현장도,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도 아니다. 전 세계 8억명이 이용하는 대표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서 볼 수 있는 일명 ‘자해(自害) 인증샷’이다. 이런 끔찍한 게시물을 올리는 이들이 어린 학생들이라니. 그래서 더 충격적이다.

인스타그램에 ‘자해’를 검색하면 3만 건 가까운 인증샷들이 쏟아져 나온다. 대부분 커터칼로 자신의 팔을 그은 다음, 피가 뚝뚝 흐르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게시한 것들이다. 누구나 검색만 하면 여과 없이 볼 수 있다. ‘자해계’(자해하는 사람의 계정)라는 단어를 해시태그(#)로 걸어 비슷한 게시물을 올린 사람들과 댓글을 주고받거나 쪽지를 보내기도 한다. 자해를 실제로 행동에 옮긴 걸 자랑삼아 얘기한다. 자신도 했으니 너도 한번 해 보라는 식이다. 최근 초·중학생들 사이에 자해 인증 놀이라는 게 신종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모양이다. 모 케이블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10대 래퍼가 자해를 비유한 노래를 부르고 손목 자해 흔적으로 보이는 사진이 SNS에 퍼지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고 한다.

자해 인증 콘텐츠의 주된 유통 통로는 SNS다. 보건복지부 중앙자살예방센터가 얼마 전 온라인의 자살 유해정보를 살펴봤더니 70% 이상이 SNS를 통해 유통됐고, 그 가운데 인스타그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신고된 사진·동영상의 84%가 자해 관련 내용이었다니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정신건강의학과에는 팔과 손에 상처를 내 붕대를 감은 자녀의 손을 잡아끌고 오는 부모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지인인 의사가 손목 자해를 시도한 중1 여학생과의 상담 내용을 들려줬다. “죽고 싶어 그랬니?” “아뇨. 답답하고 화가 나서요.” “어디서 알게 됐니?” “친구들이 해요. SNS나 카카오톡에 사진을 올려요.” “어떤 기분이 들었어?” “후련해요. 멍하다가도 아프고 피가 나오면 정신이 번쩍 들어요.”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에는 담배를 피우고 화장하는 것처럼 쉽게 친구의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자칫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따라 했다니, 말문이 막힌다.

아이들은 왜 이런 극단적인 자해 놀이에 빠져드는 걸까. 전문가들은 SNS 속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외로운지를 알리는 동시에 쿨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란 걸 인정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작용한다고 말한다. 부모나 교사 등 주변 사람에게서 얻지 못하는 걸 SNS에서 자극적인 방법으로 푼다는 얘기다. 하지만 자해가 반복되면 고통과 통증에 무감각해지고 더 센 방법을 찾게 된다. 아주 작은 감정적 동요에도 자해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심하면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그릇된 놀이 문화가 유행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몇 해 전에는 ‘기절 놀이’가 확산된 적이 있다. 목을 조르거나 가슴을 세게 눌러 잠시 실신하게 만드는 위험한 장난이었다. 실제 이 놀이를 하던 학생이 쓰러져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한 심리학자는 “과다한 컴퓨터 게임이나 자극적인 매체 탓에 자극 역치가 높아져서 웬만한 자극보다 더 강렬한 자극에서 흥분을 느끼게 되는 우리 아이들의 생활을 반영한다”고 분석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자극적인 놀이 문화가 등장할지 걱정이 앞선다. 그때마다 현상만 막는 미봉책보다는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온라인에 올라오는 자해 영상물이나 사진은 즉시 삭제되고 경고 문구 삽입이 이뤄지는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 청소년들이 영향을 많이 받는 대중문화에서 생명 경시로 비칠 수 있는 콘텐츠는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 학교나 가정에서의 건전한 놀이 문화 조성과 생명 존중 교육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민태원 사회부 부장대우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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