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용목] 구월의 마음과 달



대지를 잃어버린 인간이 화분을 키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아파트에 살면서 17층 공중까지 화분을 여럿 가져다놓았다. 말하자면 땅을 잃고서 그 땅을 겨우 한 삽씩 떠 모셔온 것인데, 나무와 꽃들이 제 크기를 찾아 자라는 틈엔 돌멩이만 포개놓은 것도 하나 있다. 딴에는 숲과 수풀 사이 바위 계곡도 곁들이겠다는 심사여서 언젠가 궁금한 방문자 앞에서 나름의 해설을 곁들일 준비도 마쳤다.

나는 그들의 집사로 일한다. 원래 그들의 가지를 쳐주는 것은 바람의 일이고 물을 주는 것은 구름의 일이었으니, 일주일에 한 번꼴로 나는 바람과 구름이 되어 자연의 일을 하는 것이다. 넝쿨을 뻗는 것들에게는 천장까지 낚싯줄을 달아 다잡을 난간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깍지벌레가 자주 끼는 것들을 위해 노란 분무기를 장만해 안개를 뿜어주기도 한다. 나의 성심성의와 무관하게 그들은 집사가 성에 차지 않는 듯하다. 나눠심기나 줄기꽂이로 화분이 늘어나는 만큼 시들시들 앓다가 물러나는 것들도 꽤 되니 말이다. 더군다나 종일 집에 머무는 집사 때문에 사시사철 고만고만한 실온에 갇혀 있으니 그들로서는 이상기후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봄이면 봄을 알고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가을을 알고 잎을 떨군다. 한 움큼의 흙에도 잊지 않고 우주의 섭리가 찾아왔다고 해야 할지, 이들이 자신만의 질서로 우주를 이루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그때에는 정말 화분들이 하나씩의 위성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17층 높이에 떠서 지구 주변을 빙빙 도는 달. 거기 집을 짓고 살 수는 없으나 멀리 바라보며 꿈꿀 수 있는 달 말이다. 달을 보면 뭔가 빌고 싶어지는데 이 화분들이 영험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가을밤 우리 머리 위를 빙빙 돌던 달처럼, 내가 죽인 화분들이 내가 망친 사랑이고 내가 키운 화초들이 내 그리움이라는 것은 안다. 밤새 떨어진 별똥별이 잔뜩 묻혀 있다는 것은 안다. 우리가 구월을 구월로 살지 않아도 달은 이제 구월의 것이어서 벌써 몇몇의 잎 끝은 누렇게 변해간다.

신용목(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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