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황시운] 우리에게 허락된 생



튼튼한 두 다리로 어디든 갈 수 있었던 시절, 한 번씩 낯선 곳으로 떠나 혼자서 오래 걸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시절을 나는 걸으면서 견뎠던 것 같다. 절정의 녹음에 파묻힌 한여름 정선의 2차선 국도를, 사나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남해의 해안도로를,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채 늙어가는 서해의 작은 섬들을, 어린 왕의 비극을 고스란히 목격한 영월의 강변을, 시커먼 기름을 걷어내고 끝내 다시 반짝이는 태안의 소금밭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지치면 아무 곳에나 주저앉아 하염없이 숲을, 바다를, 강을, 소금밭을 바라봤다. 너울대는 아지랑이 속에서,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너머에서, 굽이치는 강줄기를 타고, 세상의 빛을 모두 끌어모아 맺힌 결정 속에서 떠오를 얼굴을 기다리면서. 마음의 깊이만큼 사랑을 주지 못한 이의 얼굴이었다. 한 번도 가득 찬 적 없었던 얼굴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속닥속닥 이야기했다. 만약에, 우리에게 다음 생이 허락된다면 무엇으로든 다시 만나자고. 무엇으로든 다시 만나 다정하게 살아가자고. 그땐 내가 더 힘껏 사랑할 테니 부디 나를 알아봐 달라고. 그렇게 속삭이고 나면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지난밤, 집안의 불을 모두 끄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서운 기세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문득 비에 잠긴 창밖 세상이 오래전 보았던 산 같고, 바다 같고, 강 같고, 염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시절처럼 혼자서 낯선 곳을 걸을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어떤 얼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까맣고 축축한 허공을 오래 응시하자 창백한 얼굴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얼굴의 주인은 물을 삼키는 법조차 잊어버린 채 온종일 깊은 잠에만 빠져 있다. 나는 그 얼굴과 눈을 맞추고 속닥속닥 이야기했다. 만약에, 우리에게 다음 생이 허락된다면, 그때는 내 자식으로 와주세요. 그러면 내가 더할 수 없이 다정한 부모가 되어 줄게요. 몇 번의 생이 반복되든, 그중 어떤 생이든, 꼭 한 번은 나를 찾아와 줘요, 아빠.

황시운(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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