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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수 칼럼] 선풍기도 사치라는 에너지 빈곤층



이 폭염에 선풍기조차 없는 가구 아직도 너무 많아
이들에게 무더위는 목숨을 위협하는 재난
취약계층 고통 줄일 수 있는 맞춤형 정책 시행해야


요즘처럼 더위가 심할 때마다 생각이 나고 자책이 되는 일이 있다. 어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와 몇 달 동안 우리 집에서 같이 생활한 적이 있다. 당시 어머니는 관절염 때문에 걸음을 걷지 못하는 데다 건강이 좋지 않았고 한사코 여행을 사양했다. 여름휴가 때 어머니는 집에 남고 아내, 아이들과 함께 며칠 동안 지방에 다녀왔었다.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됐다. 어머니는 폭염과 열대야가 계속된 그 며칠 동안 전기료가 아깝다고 한 번도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두고두고 마음이 아프고 후회가 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숨이 막히는 더위에도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른바 에너지 빈곤층이다. 에너지 빈곤층은 전기료, 연료, 난방비 등 에너지 구입비용이 가구 소득의 10% 이상인 가구를 말한다. 버는 돈에서 10% 이상을 에너지 구입비용에 쓴다는 것은 그만큼 가난하다는 얘기다. 주로 쪽방촌, 지하방, 옥탑방 등에 홀로 사는 독거노인들이다. 한 달에 받는 기초생활수급비는 집세와 병원비, 식비에 쓰고 나면 남는 게 없다. 한 시민단체가 지난해 에너지 빈곤층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선풍기와 에어컨이 모두 없는 가구가 300가구 중 10가구나 됐다. 냉장고나 창문이 아예 없는 집도 많다. 열대야가 있는 날은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독거노인들은 대부분 거동이 불편하거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일반인들보다 더위에 약해 건강이 더 악화되곤 한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기업 등에서 선풍기를 무료로 지원해 주기도 하지만 일부 빈곤층에게는 무용지물인 경우도 있다. 몇 천 원의 전기료를 낼 돈이 부족해 선풍기를 틀지 못하는 것이다. 쪽방촌인 서울 서대문구 인왕산 중턱 개미마을에 사는 김윤묵(83)씨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근처 슈퍼마켓을 찾는다. 그는 “전기요금이 무서워 불도 제대로 못 켜고 사는데 선풍기는 사치”라며 “열병이 나도 그냥 버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폐지를 줍는 일을 하다 더위에 지쳐 집에 돌아와도 더위를 피할 수 없는 형편인 노인들도 많다.

폭염경보와 폭염주의보가 확대되고 있다. 이번 폭염은 한 달가량 이어지는 사상 최장, 최악의 폭염이 될 것이라는 예보가 나오고 있다. 전국에 에너지 빈곤층은 150만명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맞춤형 폭염 대책이 필요하다. 정부가 전기료 등을 지원해 주는 에너지 바우처 제도가 있긴 하다. 하지만 동절기에 한정돼 있다. 추위에 비해 더위는 덜 위험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위도 위험하다. 더위에 장시간 노출되면 두통, 어지러움, 의식 저하 등이 나타나며 심한 경우 숨질 수도 있다.

온열질환 감시체계가 시작된 지난 5월 20일부터 이달 15일까지 신고된 온열환자는 551명이고 이 중 4명이 사망했다. 지난 12일부터 15일까지 나흘간 발생한 환자는 전체 환자의 절반이 넘는 285명이며 노인 2명이 숨졌다. 환자와 사망자는 날이 갈수록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최악의 폭염으로 기록된 1994년엔 더위로 사망한 사람이 전국에서 3384명이나 됐다.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틀 수 없는 빈곤층 독거노인들에게 폭염은 재난이나 마찬가지다. 최고 기온이 35도를 넘는 날에는 60대 이상의 사망자 비율이 68%까지 늘어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경고다. 폭염은 태풍이나 홍수보다 인명 피해를 더 많이 내는 기상재해로 분류된다.

출범한 지 얼마 안 된 전국의 각 지방자치단체들에게 이번 폭염은 첫 시험대라 할 수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옥탑방에서 생활해 보겠다고 한다. 무더위에 고생이 많겠다. 박 시장이 혹시 선풍기도 틀지 않는 에너지 빈곤층 체험을 해볼지도 모르겠다. 물론 요즘 같은 무더위에 에어컨이나 선풍기 없이 생활하는 것은 끔찍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체험하지 않고 단지 비좁은 곳에서 불편함 정도를 경험하는 것만으로는 빈곤층의 실상을 깊이 알 수 없다.

전국의 각 지자체들이 경로당이나 복지관, 주민센터 등을 무더위 쉼터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이용이 어렵다. 지역별, 가구별 특성에 맞게 좀 더 세심한 정책이 필요해 보인다. 이런 시설들을 만들어 놓고 이들에게 오라고 하거나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문자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동네만 해도 도로변에 무더위 그늘막들을 설치해 놨는데 어느 곳은 한 번도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선풍기도 사치라는 에너지 빈곤층에게 복지가 집중돼야 한다. 이는 생존의 문제다. 돈이 없어 더위에 목숨을 잃어서야 되겠는가.

논설위원 js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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