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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손영옥] ‘유쾌한 정숙씨’를 넘어



처음 그 이름을 각인한 건 2012년 8월이다. 대선을 앞둔 뜨거운 여름, 출판 담당 기자인 내 책상 위로 배달된 책 한 권 때문이다. ‘어쩌면, 퍼스트레이디’라는 부제가 붙은 ‘정숙씨, 세상과 바람나다’라는 제목의 그 책은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아내였던 김정숙씨가 신영복 선생에서 가수 이은미까지 문화계 인사를 인터뷰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대선 후보 부인의 ‘내조 정치’치고는 이색적이긴 했지만, 왠지 대선 캠프 참모들의 기획 냄새가 났다.

두 번째는 지난해 5월. 재수 끝에 퍼스트레이디가 돼 청와대 관저로 이사를 앞둔 시점이다. 서울 홍은동 사저에서 혼자 짐을 싸던 그의 집 앞에서 60대 여성이 민원성 시위를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었지만, “라면이나 드시고 가시라”며 덥석 팔짱을 끼고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감으로써 ‘위기’를 한 방에 날렸다. 그런 특유의 붙임성 때문에 그에겐 ‘유쾌한 정숙씨’라는 애칭이 붙는다. 명랑성은 엄청난 자산이라 정상회담 때 빛을 발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 여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부인 이설주 여사 등과 만날 때 스스럼없이 손을 잡으며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태도는 보기에 좋았다.

문제는 참모진에 의한 ‘오버(over)’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의 말마따나 ‘쇼는 기막히게 잘하는 정부’라는 비아냥은 퍼스트레이디 이미지 연출에도 적용된다. 홈쇼핑에서 구매한 10만원대 정장을 자선 바자에 내놓으며 ‘서민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이라든가, 청와대 관내 처마에 직접 깎았다는 곶감용 감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곤 그 아래서 여유 있게 신문을 읽는 모습을 미디어에 방출한 것이 그런 예다.

10만원대 정장은 중산층 여성의 의류 구매 습관과는 동떨어져 있다.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든다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도 ‘슬로 라이프’를 주창하는 게 아니라면 시대감각과는 맞지 않는다. 한·미 정상회담 때 멜라니아 여사와 환담할 때 그 곶감을 다과로 내겠다고 홍보했었지만 감이 마르지 않아 다른 곶감을 썼다. 금방 ‘뽀록’이 날 과대 홍보를 한 것이다. 딴죽을 걸자면 참모팀이 만들려는 ‘유쾌한 정숙씨’ 이미지는 좀 구식이다. 개발연대 육영수 여사의 우아한 ‘올림머리’ 국모 이미지의 21세기 버전, 혹은 ‘명랑 버전’ 같다.

그런데 이번에 스스로 한 행보는 좀 다르게 다가왔다. 6월 초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중국 작가 한메이린(韓美林) 개인전 개막식에 참석한 것이다. 올해 82세의 한메이린은 2008년 중국 베이징올림픽 마스코트 푸와(福娃·복덩이) 디자인을 총괄하는 등 중국 예술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5세 때부터 익힌 서예를 기반으로 글씨뿐 아니라 서체 미학을 회화, 조각, 디자인으로 확장해 적용하며 전통이 나아갈 바를 보여준다. 김 여사의 서예박물관 방문은 지난해 한·중 수교 25주년 기념 치바이스(齊白石·1864∼1957)전 관람에 이은 두 번째다.

대통령 못지않게 퍼스트레이디의 동선은 상징성이 있다. 나는 그가 서양이 아닌 동양미술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닌 서예박물관에 관심을 보인 것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우리는 서양미술사 일변도의 미술교육 탓에 동양미술 문화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서양이 중세 암흑기에 있던 11∼12세기, 송나라는 르네상스보다 더 탁월한 사실주의 미술을 선보였다. 지금 우리가 외면하는 서예지만 프란츠 클라인 같은 일군의 미국 추상화가들은 서예적 선을 추상화에 도입하기도 했다.

퍼스트레이디는 장소의 정치만으로 충분히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는 셀레브레티다. 이왕이면 여기저기 얼굴 비추기식 행사 참석이 아니라 자기만의 브랜드를 갖기를 권한다. 변호사와 보건행정 전문가 경력을 살려 아동비만 퇴치와 건강한 식생활 확산 운동에 힘썼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퇴임 전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남편을 능가하는 호감도를 받은 미셸을 참고할 만하다.

손영옥 문화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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