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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이창현] 느린 열차가 만드는 평화



지난 23일 모처럼 느린 열차 여행을 경험했다. 2018 DMZ 뮤직페스티벌 주최 측이 참가자 150여명을 서울역에서 출발해 백마고지역에 도착하는 DMZ 평화열차에 탑승하게 했다. 열차는 용산을 거쳐 한강변을 거슬러 올라가더니 청량리, 성북, 의정부, 동두천을 지나 종착역에 이르렀다. 느린 열차 안에서는 객차를 오가며 연주자들이 다양한 음악 공연을 했고 참가자들은 추억 속의 삶은 달걀에 음료수를 즐겼다.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1983년 4월 나는 전방입소교육을 받으러 그곳에 갔었다. 그때는 분명 봄이었지만, 철원평야의 대전차방호벽 위에서 겨울 끝단의 새벽 추위를 절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뮤직 페스티벌은 철원 노동당사로부터 시작됐다. 노동당사 안에서는 젊은 무용수들이 군복과 인민군복을 나누어 입고 분단을 치유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리고 노동당사 밖에서는 평화열차를 함께 타고 온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고 젊은이들은 환호했다. 이어서 참가자들은 버스로 갈아타고 통문을 지나 월정리역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거대한 간판 너머 35년 전에 경계를 섰던 대전차방호벽이 여전히 남북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월정리역에서 원산까지 거리는 121㎞다. 함께 참가한 김정헌 화백은 여기서 원산까지 ‘멀다 하면 안 되겠구먼’이라며 농담을 던졌다.

월정리역 행사장에서는 강산에가 특별출연해 6·25 때 파괴된 열차를 무대 배경으로 ‘명태’를 불렀다. “겨울철에 잡아 올린 동태, 3∼4월 봄에 잡히는 춘태, 알을 낳고 서리 살이 별로 없어 뼈만 남다시피 한 꺽태, 냉동이 안 된 생태, 겨울에 눈맞아가며 얼었다 녹았다 말린 황태”라는 노래 가사를 들으니 월정리역에서 열차를 타고 원산에 가서 북한의 명태를 맛보고 싶어졌다. 이어서 고석정의 본격적인 1박2일 뮤직 페스티벌이 이어졌다.

철원에 와서 철도 노선을 확인해 보니 이곳이 경원선과 금강산선의 분기점이었다. 10여년 전 금강산 관광이 끊기기 직전 나는 외금강을 관광하면서 버스로 높은 고개를 넘어 내금강에 갔던 적이 있다. 그때 금강산선 철도가 일제 강점기에는 서울에서 바로 내금강의 장안사까지 연결됐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참고로 철원에서 남측 군사분계선까지 32㎞, 거기에서 84㎞만 더 가면 내금강에 도착한다. 철원에서부터 금강산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요즘 남북한 화해와 협력시대가 다시 열리면서 너도 나도 분단으로 끊어진 철로를 이어보자고 한다. 남북 간 철도를 연결하면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되는지 열심히 계산하고, 청년들은 대륙횡단철도로 모스크바, 베를린을 거쳐 런던까지 가보겠다는 꿈을 꾼다. 원고를 쓰는 바로 이 순간에도 남북 간에 북한 철도 현대화 방안을 모색한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북한에도 철도 노선이 운영되고 있지만 기반시설이 취약하기 때문에 새롭게 고속 열차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북측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때 이용해본 남한의 초고속열차를 보고 많이 놀랐다는 말도 함께 들려온다.

남한도 초고속으로 압축적 근대화를 이루었고, 북한도 각 분야에서 속도전을 추진해 왔으니 남북 간 철도 연결과 북한의 초고속 열차사업도 빠르게 추진될 것이다. 그러나 초고속 열차 기획도 좋지만, 기존의 느린 북한 열차도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 남한의 청년도 대륙 횡단철도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 꿈을 꾸는 것도 좋지만, 기존에 있는 북한의 경원선과 경의선을 타고 북한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여유를 갖는 것도 좋겠다. 개마고원 트레킹이 가능하다면 북한의 느린 열차를 이용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느린 열차야말로 진정한 만남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순식간에 장소 이동에만 집중하는 초고속 열차도 좋지만, 천천히 북한 사람들과 만나고 쉬엄쉬엄 북녘 산하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느린 열차가 아름다운 평화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창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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