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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고승욱] 승리라는 이름의 굴레



요즘은 야근을 하면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한두 시간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기 일쑤다. 그러다 우연히 쇼트트랙 선수 곽윤기를 봤다. 몇 달 전 지상파 방송사가 만든 예능 프로그램을 다른 방송사가 밤늦게 틀어준 것이다. 누군지 제대로 몰랐지만 재치 있는 말솜씨에 한참 웃었다. 다음날 궁금한 마음에 인터넷을 검색하고는 깜짝 놀랐다. “잘생기고 입심 좋은 선수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쇼트트랙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세계 최고였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선수권대회와 월드컵에서 딴 금메달만 20개가 넘었다. 유독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4년 뒤 베이징을 향해 3전 4기 결의를 다지고 있다는 인터뷰 기사는 유쾌했다.

평창 하면 컬링의 ‘팀 킴’이 생각난다. “영미”를 외치던 ‘안경 선배’를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스켈레톤 선수 윤성빈의 무결점 주행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평창에서 거둔 수확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는 금메달을 딴 화려한 스타에만 열광하지 않았다. 사실 평창 전까지는 경기 자체를 즐긴다는 말은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많은 사람이 평창에서 그것을 느꼈다.

은메달을 딴 선수는 “금메달을 놓쳐 국민께 죄송하다”고 울먹이지 않았다. 2년 전 리우데자네이루에서조차 그랬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평창에서 우리 어린 선수들은 국가와 사회의 이름으로 씌워진 굴레를 벗기 시작했다. 스피드스케이팅에서 0.01초 차이로 금메달을 놓친 차민규의 쿨한 유머와 ‘빙속 여제’ 이상화가 보여준 고다이라 나오와의 우정에 박수가 쏟아졌다. 곽윤기처럼 메달을 따지 못해도 좋았다. 짧은 순간을 위해 몇 년간 고된 훈련을 거듭하며 최선을 다한 선수들은 그 자체로 빛나는 존재였다. 신인에게는 찬란한 미래가, 노장에게는 경기를 즐기는 경륜이 있었다. 그들을 통해 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답답한 일상을 버틸 수 있게 한 스포츠의 힘이었다.

러시아월드컵에서 국가대표팀이 두 번의 패배를 기록하면서 인터넷이 험악하다. 태클을 하다가 핸드볼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준 장현수 선수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도를 넘었다. 쓸데없이 무리한 행동으로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의미로 ‘현수하다’는 말이 생겼다. 이 정도는 애교다. 실제로는 육두문자가 쏟아지고 가족을 향한 거친 말이 거침없이 나온다. 무서움이 느껴질 정도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자살골을 넣은 콜럼비아 선수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항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는 기사가 떠오른다. 인신공격성 발언은 테러범의 협박보다 심하다. 누가 더 독하게 말하는지 경쟁하는 듯하다. 한국 축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열성팬의 애정 어린 충고이자 사심 없는 비판이라고 주장하지만 터무니없다. 떼 지어 다니며 혹독한 글을 ‘사이다’라며 추켜세우고 자제를 촉구하면 ‘쉴드 친다’고 욕한다. 더 나은 플레이를 위한 전문가의 충고는 무자비한 공격의 무기로 활용될 뿐이다. 과거 학연주의의 폐해를 더해 사실이 아니거나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진짜인 것처럼 퍼지고 있다.

실망한 축구팬에게 감정을 배설할 통로를 제공해야 한다는 필요악론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저급한 댓글 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인터넷 실명제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경기를 즐길 줄 아는 마음이다. 1936년 히틀러가 올림픽을 체제 선전을 위한 무대로 악용한 뒤부터 국가대항 경기에서 전체주의의 잔재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월드컵도 마찬가지다. 결과만 따지는 민족우월주의는 흔히 말하는 ‘꼴통’의 이미지와 다를 게 없다. 거기에 선수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덧붙이고 싶다. 실수가 있더라도 조금 너그럽게 생각하면 훨씬 재미있는 월드컵이 될 것이다. 지금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 결과가 한국 축구의 현주소다.

고승욱 편집국 부국장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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