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칼럼] 북한 외교, 얕보면 안 된다



생존 문제와 직결돼 있어 ‘저팔계식 외교’ 능숙하고 외교관들 전문성 뛰어나
6·12 싱가포르 담판에서 트럼프 상대로 남는 장사 한 것은 강한 협상력 때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행태로 요즘 국제정세는 바람 잘 날 없다. 그는 요동치는 한반도 정세의 한복판에 서 있지만 비핵화 흐름을 제대로 주도하고 있는 건지 왠지 불안하다. 국익을 앞세워 중국과의 무역 및 군사 갈등을 부추기는가 하면 영국 프랑스 독일 멕시코 등 전통적 우방들과의 관계 악화를 마다하지 않는다. 등을 돌렸던 국가들에는 화해 제스처를 보낸다. 세계를 들었다 놨다하는 통에 외교지형마저 바뀌는 모양새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각국 정상들의 고민이 클 것 같다.

그런 트럼프를 잘 요리한 이가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6·12 북·미 정상회담 결과를 놓고 다양한 평가들이 나오지만, 김정은이 승자라고 보는 게 적확할 것 같다. ‘은둔의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단번에 벗어버린 건 물론이고 자신보다 37살이나 많은 ‘거래의 달인’ 트럼프와의 담판에서도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았다. 트럼프에게 미국이 그토록 원해온 6·25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을 약속한 대신 회담의 주의제인 비핵화 문제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큰 가닥을 잡았다. 담판 직전까지 트럼프가 강조하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를 공동성명에서 뺐다. 성명 세 번째 항에 ‘완전한 비핵화’라는 표현이 들어갔을 뿐이다. ‘일괄타결’은 실종됐고, 김정은이 주장하던 ‘단계적·동시적 비핵화’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북·미 회담 이후 비핵화 일정과 방식, 속도는 전적으로 김정은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최근 북한에 비핵화 초기 단계 이행을 재촉하는 등 미국마저 김정은의 ‘선의의 행동’을 기다리는 형국이 돼버렸다. 비핵화 로드맵은 여전히 안갯속이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을 통한 무제한적 북핵 사찰이 언제쯤 이뤄질지는 깜깜이다.

그렇다고 비관할 상황은 아니다. 김정은의 현란한 행보와 북한의 경제난 등을 감안할 때 비핵화 흐름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단기적으로 북한은 미군 유해 일부를 돌려보낸 뒤 미사일 엔진시험장을 폭파하는 등 비핵화 조치를 취해나갈 것이다. 비핵화의 상응조치인 체제 보장, 대북 제재 완화 및 경제 지원이라는 변수들이 있으나 남·북·미·중 간 협의를 통해 해결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향후 협상 과정에서 김정은의 북한이 미국에 밀릴까. 그렇지 않을 듯하다.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북한 외교는 강한 면모를 보여줬다.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와 남북 정상회담, 북·중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등에서 주도권을 놓은 적이 없다. 우리나라와 중국, 미국의 상이한 이해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해 실리를 극대화했다. ‘34세인 김정은이 국제 외교무대에 나오면 미국과 중국의 노회한 정상들에게 휘둘릴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 역시 오판이었다. 허둥대기는커녕 지도자답다는 인상을 각인시켰다. 앞으로도 북한이 밀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까닭이다.

북한 외교는 예전에도 강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생존 문제가 걸려 있다는 절박성이 첫째 요인이다. 수십년 간 ‘철천지 원수’라고 비난해온 미국의 대통령과 김정은이 마주 앉을 수밖에 없었던 건 체제보장을 확약받기 위해서다.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지을 담판인 만큼 북한은 김일성·김정일의 ‘벼랑 끝 전술’에 버금가는 끈질긴 협상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외교라인의 연속성이다. 여야 정권교체라는 게 없는 왕조국가여서 북한 외교관들의 경우 전문 분야가 정해지면 바뀌지 않는다. 오랜 세월 한 분야에서만 근무하다 보니 전문성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또 외교관으로 발탁되면 협상을 성공으로 이끄는 방법, 회담을 깨는 방법, 협상에서 고지를 선점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배운다. 중요한 협상 도중에 화장실에 가면 안 되기 때문에 협상 시작 전에 물을 마시는 것은 금기사항이라고 한다.(‘태영호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

김정일이 1990년대 외교관들에게 지시한 ‘저팔계 외교’에도 다시 눈길이 간다. 김정일은 소련 붕괴 이후 미국과의 외교에 주력해야 한다면서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가 솔직한 척, 어리석은 척, 억울한 척, 미련한 척하면서 어딜 가나 얻어먹을 것은 다 얻어먹은 것처럼 이제 외교를 저팔계식으로 해야 한다. 저팔계처럼 자기 잇속을 챙길 수 있다면 적에게도 추파를 던질 줄 알아야 한다. 미국놈들로부터 핵도 지키고 받아낼 것도 다 받아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정은 외교도 ‘저팔계 외교’다. 정신 바싹 차려야 한다. 오늘은 6·25전쟁 68주년이다.

편집인 j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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