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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손영옥] 발레리나, 나이를 묻지 마세요



‘처음 늙어보는 사람에게’라는 책이 연초 나왔다. 자신은 마치 두 번 늙기라도 한 것처럼 훈수 두는 책 제목이 생뚱맞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필자는 42세에 파킨슨병을 선고받은 미국 최고의 정치 칼럼니스트 마이클 킨슬리. 그가 20여 년 동안 남들보다 일찍 늙어가며 깨달은 것들을 쓴 책이다.

병이 아니라 직업 탓에 ‘일찍 늙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활시위같이 팽팽한 근육이 무기가 되는 운동선수들이 그렇다. 발레리나도 그런 직업군의 하나. 이들이 다른 직업이라면 생애 절정기인 마흔에 은퇴한다는 건 상식이다. 코앞에서 그들의 육성으로 은퇴를 앞둔 심경을 듣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마포문화재단이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최근 선보인 낭만 발레의 꽃 ‘지젤’의 주역 무용수를 만났을 때였다. 통상 여주인공 지젤에 꽂히는 언론의 관심이 이번엔 남주인공에게 더 쏠렸다. 나이 요인 탓이다. ‘알브레이트’를 맡은 네덜란드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최영규는 2011년 보스턴국제콩쿠르 금상을 받기도 했지만, 27세의 한창 물오른 때다. 반면에 지젤 역의 김세연은 스페인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로 스타성은 있지만 시쳇말로 한물 간 나이다.

38세. 발레리나로서는 황혼에 접어드는 나이다. “나이는 얘기하고 싶지 않네요”라고 운을 뗀 그녀는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황혜민(39)의 은퇴 발표 소식을 언급하다 와락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했다. “무용수에게 은퇴는 한 번 ‘죽는 느낌’일 수 있다”고 힘겹게 뱉어내다 감정이 복받쳤던 것이다. 11살 나이 차쯤이야 하는 배포도 있었다. 최영규보다 두 살 더 어린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과도 호흡을 맞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제 표정에서 모성애가 묻어난다는 리뷰도 있었는데요, 뭐.” 언론의 짓궂음도 눙칠 줄 아는 나이. 그 작고 인형 같은 얼굴은 그렇게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심리적 초로’가 돼 있었다.

“젊을 땐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됐죠. 지금은 연습 때 굉장히 (체력) 조절을 잘해야 공연까지 갈 수 있어요. 그게 힘들죠. 유연하게 몸을 썼다고 생각하는데 나이 탓에 각도가 줄어들 수 있어요. 항상 거울을 보며 체크를 해요. 그러니 일이 배가되지요.”

뚜껑이 열린 공연은 연륜이 젊음을 이긴 무대였다. 38세의 근육으로 춤을 춘 시골 소녀 지젤은 너무도 발랄해 뻔뻔스러울 정도였다. 사랑에 눈멀었을 때의 행복감, 그 사랑에 배신당하자 미쳐갈 때의 광기 등 자유자재의 변신에 관객은 넋을 잃었다. 완벽한 기량의 최영규의 젊음조차 조연으로 비칠 정도로 그녀는 혼신을 다했다. 전력질주하는 그날의 공연에서 나이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읽었다면 선입견일까. 진정성은 젊음을 이길 수 있다는 걸 ‘황혼의 발레리나’ 김세연은 보여줬다.

그녀가 인터뷰 때 보인 눈물이 은퇴 후 삶에 대한 불안 탓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그런데 무용계에 몸담은 이들은 너무 좋아해 그것 하나에 평생을 바친 무용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안타까움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발레리나의 은퇴 이후 삶은 대개 안무나 코치다. 그들이 미치도록 좋아했던 춤꾼으로 계속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저런 열정을 뒤로하고 무대 뒤로 사라져야만 하는 것일까. 청춘이 아니라 원숙함이 주는 감동이 더 클 수 있는데도 말이다.

네덜란드댄스시어터(NDT)가 답이 될 수 있다.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이곳에선 은퇴한 무용수들을 지원하기도 한다. 40, 50대들이 여전히 무대에 설 수 있게 프로그램을 짜주고 제작비를 대주는 것이다. 우리는? 몸이 말을 안 들을 수도 있지만 편견이 못 서게 하는 것일 수 있다. 춤은 20대에 춰야 정석이라는 고정관념, 혹은 가치관이 바뀐다면 가능한 일이다. 나는 육십이 되어 추는 김세연의 발레가 여전히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손영옥 문화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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