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오병훈] 억새꽃



현관으로 들어서자 실내가 환하게 밝아졌다는 느낌이다. 우산꽂이로 쓰는 작은 항아리가 오늘따라 더욱 선명하게 반짝이는 것 같다. 가을인가. 억새의 계절이 왔어도 도심에서 일상에 쫓기다 보면 가을을 느끼지 못하고 지내기 일쑤다. 골목에 버린 억새꽃 한 다발을 아이가 지나치지 않고 갖고 와 꽂아둔 것이리라. 억새꽃 한 움큼이 어두운 실내를 온통 너른 초원으로 만들었다. 하얀 억새꽃이 나부끼는 창녕 화왕산으로 나를 데려간다.

억새 줄기는 연약한 듯 보이지만 절대로 꺾이는 법이 없다. 세찬 바람에 잠시 고개를 숙이는 듯하지만 다시 일어서는 억새의 자존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라고는 잎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을 뿐이다. 스치기만 해도 살갗을 베이고 마는 억새의 날 선 잎사귀. 그것도 배고픈 암소에게는 방어무기가 되지 못한다. 억새는 하얀 까락을 피우기 위해 이른 봄눈이 녹을 때 싹을 틔우고 새싹이 자라 뜨거운 여름 햇살과 세찬 바람에 맞서며 몸 안에 순수를 키우지 않았던가. 새하얀 억새는 붉은 단풍과 함께 가을을 느끼게 하는 자연물이다.

서울에서도 난지도 하늘공원을 찾으면 드넓은 억새밭에서 가을을 느낄 수 있다. 억새 그루터기 아래를 헤집어보면 연분홍 야고 꽃이 고개를 숙이고 우리를 맞이한다. 억새는 이처럼 작고 예쁜 꽃을 땅속줄기에 품고 더불어 살아왔다. 마치 종 모양의 통꽃이면서 꽃잎 끝이 붉은 입술인 양 앙증맞다. 사람들은 억새의 하얀 까락을 보면서 너른 풀밭을 생각하지만 발아래 그늘진 곳에 이처럼 예쁜 꽃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 자신의 품에 다른 종을 키운다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며 거룩한 마음이 아닌가.

까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은 씨를 솜털에 매달고 멀리 보내려는 생존전략이다. 되도록 세찬 바람일 때 멀리 보낼 수 있으므로 단단하게 붙잡고 있다. 우리 집을 찾은 억새 다발도 어느 집 실내에서 사랑받다가 하얀 솜털이 날리니까 버렸을 것이다. 억새 한 묶음으로 한동안 가을을 느끼며 초원에서 지낼 수 있게 됐다.

글=오병훈(수필가),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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