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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동 칼럼] 경제라 쓰고 정치라 읽는다



얼마 전 세제개편 설명회에 나온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초췌했다. 오른쪽 눈은 충혈됐고, 왼쪽 입술은 부르텄다. 연민의 정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에게 쏟아진 것은 격려가 아닌 비난이었다. 김 부총리는 고용 확대와 소득 재분배를 위해 여유 있는 계층을 상대로 세금 인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증세는 없다’던 약속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다. 왜 정책 기조가 변경됐는지, 세금주도 성장이 아니냐는 추궁이 있었으나 말을 아꼈다. 스스로도 겸연쩍었던지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유지하지 못해 유감”이라고 했다. 짐작되는 바 있으나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 같다.

세금을 어떻게 얼마나 걷고, 어디에 쓸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야말로 국가경영의 핵심이다. 집권세력은 조세정책을 통해 국정운영 방향의 틀을 잡는다. 그런 만큼 조세정책은 단순한 경제정책 그 이상의 의미, 즉 정권의 국정철학을 담고 있다. 지난 2일 발표된 세제개편안 역시 문재인정부의 통치철학을 대변한다. 정치적 견해에 따라 호불호가 엇갈릴 수는 있으나 조세정책 자체가 갖고 있는 정치적·사회적 함의를 생각하면 집권세력의 권리인 동시에 선택이다.

알다시피 절대적으로 착하거나 옳은 정책은 없다. 조세정책이 딱 그렇다. 잘 쓰면 보검이지만 자칫 자해의 칼이 될 수도 있다. 인류 역사가 증명한다. 프랑스 대혁명이 그러했고, 미국의 남북전쟁도 조세저항에서 비롯됐다. 박정희정권 붕괴가 부가가치세 신설에서 잉태됐다는 분석이 있고, 노무현정권도 부동산 세제로 위기를 자초했다. 목적에 과도하게 치우치면 부작용이 커지고, 반대의 경우 죽도 밥도 안 된다. 거위 털 뽑듯 조심스레 하더라도 반발이 큰 게 세금 문제다. 불과 4년 전 경험한 일이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 발전사는 세금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정치가 경제에 과도하게 개입하면 경제는 숨 쉴 틈이 좁아진다. 어느 정권 할 것 없이 그랬지만 새 정부에서마저 경제에 대한 정치의 과잉 지배가 걱정된다. 증세 과정이 그랬다. 옳고 그름을 떠나 세제개편안 마련 과정을 보면 상식에서 벗어난다. 정치권이 말을 꺼내자 청와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쳤다. 논의 절차는 생략되다시피 했다. 운전대 잡은 김 부총리는 중간에 핸들을 급히 꺾어야 했다. 세금 인상 없다던 그는 졸지에 바보 아닌 바보가 됐다. 보편증세가 아닌 부자증세에 정치적 냄새가 풍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증세 방법에 대해선 논란이 여전하지만 증세 자체엔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가 형성돼 있는 상황이었는데 굳이 전쟁 치르듯 처리할 필요가 있었을까. 과격하거나 극단적이면 납세와 관련한 연대의 축이 무너져 자충수가 되고 결국 조세저항을 초래한다. 민주주의는 절차적 비용의 대가라고 하지 않는가. 여기에 명예과세니 존경과세니 사랑과세니 이름 붙이는 건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정치 과잉의 경제가 낳은 한심한 말장난이다.

예나 지금이나 새 정권이 들어선 직후 대통령과 재벌의 만남은 익숙한 광경이다. 청와대는 허심탄회한 시간을 갖고 이해의 폭을 넓혔다고 한다. 하지만 칼자루 쥔 대통령과 칼날 위에 선 재벌의 어색함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과거엔 ‘헤픈’ 웃음도, ‘무의미한’ 악수를 나눈 적도 있었다. 맥주잔 부딪치며 ‘경제를 위하여’라고 건배사를 외친다고 투자와 채용이 늘어나고 그동안 쌓였던 적폐가 해소될까.

대통령이 경제인을 만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건 아니나 권장할 일도 아니다. 과거 정부를 돌아보자. 가깝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물론이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재벌 총수를 만났다. 돌이켜보건대 박수칠 일이었는가. 정치이벤트 하듯 이뤄진 만남이 경제에 약이 됐던가, 독이 됐던가. 정치가 생물이듯 경제도 생물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마음에 없더라도 권력을 향해 웃음을 팔고 아부하는 게 경제의 본능이다. 듣기 거북하겠지만 솔직히 정치와 경제의 칵테일이다.

박현동 논설위원 hd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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