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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이기호] 가려야 보이는 것들



작가가 되겠답시고 한 삼 년 동안 신춘문예와 문예지 공모에 줄기차게 응모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는 주말에만 하고 주중에는 공공도서관과 옥탑방에 웅크리고 앉아 계속 소설만 읽고 써댄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쓰면 뭐하나. 결과는 매번 본심에도 오르지 못한 채 탈락. 삼 년째에도 본심에 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지자 억병으로 술에 취해 이게 심사가 좀 잘못된 거 아니냐고, 심사위원들이 학맥 따라 인맥 따라 뽑는 거 아니냐고, 멀쩡한 전봇대를 붙들고 오랫동안 주정을 늘어놓기도 했다. 전봇대에 적혀 있던 한국전력 마크를 보면서 너도 공기업 출신이라고 나를 무시하는 거냐, 왜 사람이 말을 하는데 내 눈을 안 보고 다른 전봇대 눈만 보고 있냐,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던 내가 세월이 흘러 어찌어찌 작가가 되고, 또 어쩔 수 없이 신인 작가를 뽑는 공모전 예심에도 몇 번 참여하게 되면서 그래도 이 심사가 이 땅에 몇 안 남은 공정한 룰이 작동되는 심사구나, 아무것도 안 보고 오로지 작품만 보는구나, 스스로 깨닫고 반성하게 됐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 심사는 대개 응모자의 인적사항을 모두 지운 채 작품만 놓고 평가한다. 그래서 작품을 쓴 사람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문학을 전공한 친구인지, 심사위원들이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다. 혹, 심사위원의 제자나 지인의 작품이라면 인적사항을 모두 가려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의구심을 살 법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심사위원들의 선택을 얻지 못한다면 결코 당선작이 될 순 없다. 개인적으론 단 한 번도 그런 부탁이나 청탁을 하는 심사위원을 본 적이 없었다. 문인끼리는 ‘쪽팔려서’라도 그런 부탁을 할 수가 없다. 만인에게 심사위원 명단과 작품이 공개되는 심사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올해부터 블라인드 채용이 공기업과 일반 기업에 본격적으로 도입된다고 하니, 이곳저곳에서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 취준생들은 압도적으로 지지를 보내고, 나 또한 전적으로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대 측 목소리도 무시할 순 없는 법. 해서 이 자리에서 그 차이에 대해 몇 가지만 말해보고자 한다. 반대 측 주장 중 하나는 명문대를 나온 사람에게 역차별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명문대에 입학한 것도 실력이고 능력인데, 왜 그 점은 무시하는가 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것이 실력이고 능력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력서에 학력사항을 모두 지운다고 필기시험마저 없애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직무적성검사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은 대학 때 노력하지 않아도 명문대를 나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우선권을 줘야 한다는 말인가. 동의할 수 없는 입장이다.

또 하나의 반대 주장은 ‘깜깜이’ 채용이 될 것이라는 우려이다. 학력도 외모도 토익 성적도 안 보고 어떻게 사람을 뽑을 수 있느냐는 주장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그만큼 우리 기업이 그동안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손쉽게 숫자로, 보이는 것만으로 뽑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블라인드 채용이 지닌 함의 중 하나는 사람을 찬찬히 자세히 보자는 뜻일 터. 편견을 배제하고 인성과 적성 중심으로 기회를 주자는 의도이다. 그러자면 자연 사람을 뽑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기업에도 더 좋은 방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김영하 작가는 경영학과 출신이고 장강명 작가는 도시공학을 전공했다. ‘7년의 밤’을 쓴 정유정 작가는 광주에 사는 간호사 출신이고, 몇 년 전 혼불문학상을 받은 최문희 작가는 1935년생이다. 모두 전공, 나이, 지역에 상관없이 작품만으로 선택받았다. 앞으로는 기업에서도 이런 인재들이 두루 채용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아울러 정부도 장차관 인선 발표할 때 제발 출신학교, 지역 좀 빼고 얘기하자. 기업에는 블라인드하자면서 이건 뭔가. 좀 더 꼼꼼해질 필요가 있다.

이기호(광주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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