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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새로워지겠습니다] 분단의 상처, 화해로 치유하겠습니다



6·25전쟁이 났을 때 아버지는 전국 청년조직인 대동청년단 해남군 지부 부단장이었고, 어머니는 대한부인회 황산면 지부 회장으로 일하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좌익 편에서 보면 눈엣가시였습니다. 한 달 만에 고향 해남이 인민군 점령 하에 들어가자 우리 가족은 좌익의 해코지를 피하려고 버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형, 저는 붙잡혀 목포로 압송됐습니다. 형과 저는 곧 풀려났지만 아버지는 고문을 받았고 나중에 해남으로 압송, 얼마 동안 읍내에 갇혀 계시다 석방됐습니다.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으로 석 달을 누워 지내셨습니다.

그러다 서울 수복 이후 인민군이 빠져나갔고 우리가 살던 곳은 또 한 번 진공상태가 됐습니다. 이번에도 좌익 사람들이 우익 사람들을 잡아갔습니다. 저도 붙잡혔으나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 도망쳤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잡혀가신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행방조차 모른 채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다가 해질 무렵 사살됐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급히 들것을 만들어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뜻밖에 아버지는 살아계셨습니다. 아버지 옷은 온통 피에 젖어 있었고, 모발은 피와 흙이 범벅이 돼 엉겨 붙어 있었습니다. 총알이 아버지의 왼쪽 등에서 비스듬히 왼쪽 겨드랑 밑으로 관통했고, 칼은 오른쪽 등을 정면으로 관통했습니다. 그러고도 살아남았으니 기적이었습니다.

저는 이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오랫동안 좌익세력에 적개심을 품었습니다. 이글거리던 적개심이 사라진 건 철이 들고 목회자의 길을 가면서부터였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움의 토양을 모두 새롭게 한 뒤에야 비로소 사람을 바라보는 인식에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1990년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라는 단체의 상임대표로 5년간 일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우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을 규명하는 일을 했으므로 좌익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우리 민족 구성원들 중에는 우리 가족이 겪은 악몽 같은 상처를 정반대편에 있던 사람들도 똑같이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억울한 죽음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분노와 원한으로 사무치게 했고, 민족 분단보다 더 깊은 분단의 골을 형성했습니다.

남북문제와 관련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민족적 회개와 화해가 필요합니다. 없었어야 할 분단이었고 싸우지 말아야 할 형제가 싸웠으며, 미워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미워했고,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죽인 게 비극이었습니다. 비극의 중심에 좌우익이란 이념이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민족적 차원의 화해를 이뤄야 합니다. 이 길만이 민족의 비극을 극복하고 분단 현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해동 목사(평화박물관 이사장, 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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