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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이나미] 영원한 아이와 조로한 어른



미래는 불안하고 현실은 답답하다는 이들이 많다. 더위만큼이나 짜증나는 상황도 많기 때문이리라. 삼복더위에 촌각을 다투면서 무거운 물건을 나르면서, 에어컨도 작동되지 않는 부엌에서 뜨거운 기름에 다쳐가며 불 앞에 서 있으면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부은 다리와 허리 통증으로 잠을 설치면서, 꼼짝 않고 경비 서느라 더위에 땀 한 번 제대로 닦지 못하면서 인생은 아름답고 미래는 밝다고 마냥 외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낸다. 자신과 주변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다. 반면에 그럴듯한 직장 아니면 아예 노는 게 낫다는 이들도 있다. 힘들게 반복되는 일상을 참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모나 주변에 의지하는 이들은 인생에 책임지는 것이 싫어 꾸준한 관계도 맺지 못한다. 결혼하고 아이 낳는 관습적인 삶도 거부한다.

부모가 돈이 많으면 인내심이 부족하고, 부모가 돈이 없으면 어려운 일을 견뎌야 될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인생에 대한 책임감은 꼭 부모의 재력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경제관념과 인생에 대한 책임감은 학벌과도 크게 비례하지 않는다. 부모들이 무능력하고 무책임하면 자녀들이 빨리 어른이 되는 인생의 역설을 만나기도 한다. 훌륭한 부모들이 뒷바라지를 너무 열심히 하다보면 자녀들이 오히려 미숙해지기도 한다. 정신과 의사 에릭 에릭슨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버리는 것을 조기종결(foreclosure)로, 영원히 아이처럼 남고 싶어 하는 현상을 청소년 시기의 유예(moratorium)라 했다.

융 심리학자 폰 프란츠는 ‘영원한 소년과 창조성’(집문당)에서 끝까지 아이처럼 살고 싶어 하는 영원한 아이(eternal child)상과 조로한 어른 (senex)을 대비해 설명했다. 영원히 아이로 남고 싶은 사람들은 아이의 창조적 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책임감을 갖고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원한 아이’의 문제는 청년기뿐 아니라 노년까지 따라다니기도 한다. ‘영원한 아이’ 콤플렉스에 사로잡히면 황혼의 외도에 빠지기도 하고, 대책 없이 허황된 일을 벌이기도 한다. 긍정적인 경우도 물론 없는 것은 아니다. 고갱은 중년에 직장을 그만두고 타히티로 떠나 결국 역사에 남는 화가가 되었다. 쉰 살을 넘긴 후 병에 걸려 외롭고 가난하게 죽게 되었으니 자신에게는 결코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반대로 너무 빨리 ‘노인(senex)’ 원형에 사로잡혀서 젊은이다운 창조성을 잃어버리는 이 중에는 패기와 희망 대신 파괴적인 냉소적 태도에 빠져 불의와 타협하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세상은 그런 거 아니냐며 돈만 밝히기도 하고, 정직하지 못한 권력에 빌붙어 약자를 괴롭히기도 한다.

너무 일찍 권력을 잡은 김정은은 무모함의 측면에서는 영원한 아이 원형에 사로잡힌 셈이고, 권력의 맛에 도취돼 정의와 평화에 대해서는 냉소적이니 병든 노인 원형에 사로잡힌 셈이다. 감당하지 못할 부와 권력을 부모로부터 받은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냐고 말은 하지만, 자녀들에게 의지하며 영원히 죽고 싶지 않아 하는 애 같은 노인들도 있다. 겉만 늙어버린 영원한 아이다. 헬조선에 무슨 희망이 있겠냐며 일찌감치 패기를 잃어버린 젊은이의 마음에는 조로한 노인 원형이 숨어 있어서 노인들보다 더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간다.

집이 어려워 수영을 그만둘까도 생각했다는 안세현 선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젊음도 아끼면 똥 된다”라는 문장을 올렸다. 할머니들의 “어차피 썩을 몸, 아껴 무엇하냐” 라는 말과 닮아 있지만 멋진 결기가 느껴진다. 그녀의 대의가 자아의 욕심을 뛰어넘기 때문이리라.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도 어린이 원형과 노인 원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만 원형의 힘에 사로잡히지 않고 객관적으로 현실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이나미 심리분석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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