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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칼럼] 한국의 버핏, 있다면 지금이 말할 때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것은 2011년 8월이었다. 그는 빌 게이츠에 이어 미국 부자 랭킹 2위였다. 버핏은 이 글에서 초고소득자를 가리켜 ‘메가리치(mega-rich)’란 표현을 썼는데, 뉴욕타임스는 ‘슈퍼리치(super-rich)’로 제목을 달았다. ‘슈퍼리치 애지중지, 이제 그만’이란 타이틀의 기고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도자들은 희생 분담을 요구해 왔다. 그러면서 나를 빼먹었다. 나의 메가리치 친구들은 어떤지 봤더니 그들도 희생을 요구받지 않았다. 빈곤층과 중산층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나가고, 대다수 미국인이 수입과 지출을 맞추려 분투하는 동안 우리 메가리치는 특별한 세금혜택을 누렸다. 정부는 우리가 멸종위기종이라도 되는 양 보호하려 안간힘을 쓴다.”

그는 2010년 연방정부에 냈던 세금을 공개했다. 693만 달러. 엄청 많아 보이지만 자신이 벌어들인 과세대상 소득의 17.4%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의 사무실 직원 20명에게 적용된 세율은 평균 36%였다. 이렇게 된 이유를 버핏은 2000년 이후 ‘돈이 돈을 버는’ 자본소득에 너무 관대해진 세금 구조에서 찾았다.

그는 “만약 내가 워싱턴에 있다면 자본이득과 배당금을 포함해 100만 달러 이상 고소득자의 세율을 즉각 올릴 것이다. 1000만 달러가 넘는 소득에는 거기서 추가로 더 올리자고 제안하겠다. 나와 억만장자 친구들은 그동안 충분히 보살핌을 받았다”며 글을 맺었다. 요약하면 “나는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버핏이 이런 글을 쓴 것은 양극화와 불평등이 최대 수혜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심각하다는 판단에서였을 테다. 그가 꺼낸 증세론의 당위성을 입증하듯 그 다음 달 뉴욕에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벌어졌다. ‘1%대 99%’란 구호가 등장했다. 시위는 미국 전역에서 2개월 넘게 이어졌고 유럽으로 확산됐다. 동시에 부자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독일에 ‘부자증세를 요구하는 부자들’이란 단체가 생겼다. 슈퍼리치 50명으로 구성된 이 모임은 “2년간 5% 부유세를 내면 1000억 유로(약 160조원)의 재원이 마련돼 사회안전망 확충에 쓸 수 있다”며 자신들의 세금을 올려 달라고 ‘떼’를 썼다. 프랑스에서는 억만장자 16명이 같은 이유로 세금을 더 내겠다면서 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문재인정부의 증세론은 생각보다 일찍 나왔다.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의 소요 재원 178조원이 부각되자 곧바로 꺼내 들었다. 박근혜정부가 ‘증세 없는 복지’란 구호에 갇혀 5년간 고전하는 걸 봤기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초대기업과 초고소득자”로 증세 대상을 규정했다. 버핏의 글에 나왔던 ‘슈퍼리치 증세’란 표현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이 정부는 영리하고 특히 프레임 경쟁에 탁월하다. 슈퍼리치 증세론에 맞서 ‘새 발의 피 증세’ ‘포퓰리즘 증세’ ‘눈 가리고 아웅 증세’ 등 반대 프레임이 제기됐지만 역부족인 듯하다. 새 발의 피는 그렇게 세금 걷어봐야 얼마 안 된다는 주장인데, 거꾸로 ‘엄청난 부자들한테 얼마 안 되는 돈 좀 걷는 게 뭐 그리 잘못이냐’는 생각이 들게 한다.

증세 논쟁은 한국의 슈퍼리치를 도마에 올렸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말처럼 소득세의 경우 과표 5억원 이상으로 범위를 정할 경우 4만명쯤 된다. 초대기업은 과표 2000억원 초과 기업으로 한정하면 116곳이 해당한다. 국민의 70%가 슈퍼리치 증세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나왔는데, 정작 그 대상인 슈퍼리치의 목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고 있다.

버핏의 글은 ‘버핏세’라는 조어를 낳았다. 그는 6년이 지난 지금도 집요하게 이를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버핏의 지지를 끌어낸 건 버핏세 도입을 공약하면서였다. 한국의 버핏, 과연 있을까. 있다면 지금이 목소리를 내볼 만한 때가 아닐까.

태원준 온라인뉴스부장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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