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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새로워지겠습니다] 나는 도둑놈입니다



솔직히 당황스럽습니다. 내 부정직을 말해 달라니까요. 그것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서요. 성서의 사람들 중에 거짓말하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요.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과 다윗은 또 어떻고요. 개혁자들이 개인적으로는 정직했는지 몰라도 역사적 과오와 한계 또한 많았는데, 위대한 개혁운동을 정직이라는 윤리적 차원으로 축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고작 생각난 것이라고는 교통신호를 좀 어긴 것, 아내와 자녀, 교인들에게 가볍게 약속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들, 작가로서 원고 마감일 전에 꼭 보내겠다는 말이 “짜장면, 지금 막 출발했습니다”는 말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는 것, 뭐 그런 것들이 생각납니다. 아, 어릴 적 옷장에 걸려 있던 아버지의 바지에서 매일 조금씩 돈을 꺼내서 과자 사먹었습니다. 가슴이 시리고 시큰합니다.

은근히 저항하던 제게 퍼뜩 떠오른, 잊고 있던 도둑질이 생각났습니다. 책이라면 환장하는 제게, 한 권 사면 한 끼 굶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신대원생에게 서점은 실로 유혹의 땅입니다. 그곳에는 왜 이리 선악과가 많은지요. 에덴에는 한 그루였는데 말입니다. 지혜롭게 할 만한 것이 지천입니다. 수업만 마치면 구내서점에 죽치고 앉아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는 것이 낙이었으니까요.

대전 시내에 대형서점이 있었습니다. 자취방과 가까워 종종 들렀습니다. 당장 필요한 신학 책도 겨우 사는 터라 좋아하는 소설이나 시집은 언감생심이지요. 책장에 기대어 시를 하나 읽고, 소설 하나 집어 들고 휘리릭 넘기면서 침을 흘리곤 했지요. 신학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와 생경하지만 유려한 문장, 반짝반짝 빛나는 상상력과 촘촘한 관찰과 잘 짜인 서사들이 황홀했습니다.

책 한 권을 슬쩍 가방에 넣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 그 책을 들고 그 서점으로 갔습니다. 매대 위에 올려놓고 투어를 하는 찰나, 서점 매니저가 “어, 이 책이 왜 여기 있지”라며 집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책인데요”라고 말했지 뭡니까. 책 밑에는 서점 도장이 콱 박혀 있고, 밑줄도 좍좍 그어놓았으니 빼도 박도 못하게 됐지요. 실컷 욕먹고는 가져가라고 던져주더군요. 연탄가스 먹던 그 눅눅한 자취방으로 돌아와 펑펑 울었습니다.

책을 훔쳐서라도 읽고 싶던 신학생은 책을 쓰는 신학자가 됐습니다. 남의 생각도 함부로 갖다 쓰면 안 됨을, 책으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으며 깨달았습니다. 실컷 울고 내다 버렸습니다. 몰래 집어 들고 나올 때 버린 양심을, 책을 버리면서 다시 주웠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컴컴한 것을 발설했는데 왜 이리 환하고 시원한지요.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 했습니다(롬 5:20). 그 은혜의 전제는 죄를 고백함입니다. 정직이 은혜입니다.

김기현 목사(부산 로고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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