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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손수호] 벨기에 공주의 좀 판타지한 느낌



벨기에 공주의 좀 판타지한 느낌 기사의 사진 한국인이 선호하는 나라에 스위스가 늘 상위에 오른다. 자연의 아름다움에다 중립의 가치를 지향하는 전통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800만 인구에 땅이 남한의 절반에 불과한데도 국제적 명성을 지닌 도시가 수두룩하다. 수도 베른을 비롯해 금융업이 발달한 취리히, 외교의 메카 제네바, 아트페어로 유명한 바젤, 알프스 기슭의 인터라켄과 루체른, 올림픽의 수도 로잔, 포럼의 도시 다보스가 그렇다.

스위스와 비교되는 나라가 벨기에다. 경상도 크기, 인구 1100만에 공식어가 3개인데서 알 수 있듯 주변 국가에 많이 시달렸지만 지금은 유럽 정치의 중심이 됐다. 6.25 전쟁 때는 벨룩스 대대를 파병해 106명의 희생자를 냈다. 화장품을 비롯한 화학산업이 발달해 있고, 제약 및 바이오 산업은 글로벌 강국이다. 이화여대 솔베이 연구센터에 2000만 달러 넘게 투자했다.

이 벨기에 왕국의 공주가 최근 한국을 다녀갔다. TV에서 본 그녀의 표정은 우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서양의 공주님을 처음 뵙는 것이어서 조금 판타지한 그런 느낌도 듭니다"라고 말했다. 258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와서 MOU를 16개 체결했다. 공주의 호화스런 외출이 아니라 국왕 특사의 비즈니스 여행이었다. 그래도 아스트리드 공주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특유의 판타지한 느낌과 더불어 벨기에의 문화적 자산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벨기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위다의 동화 '플랜더스의 개'다. 넬로라는 조손가정의 꼬마와 파트라슈라는 개가 나누는 우정은 지구촌 어린이들의 가슴을 적시기에 충분하다. 넬로를 괴롭히던 방앗간집 주인 코제 아저씨가 회심을 하고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하기 바로 전날, 성당 제단 앞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장면에선 눈물을 주루룩 흘리게 된다. 작품 이름의 플랜더스가 지금의 플랑드르다.

미술사에도 스타가 많다. '플랜더스의 개'에서 신격화되는 루벤스는 17세게 유럽 화단의 거장이었다. 종교화에 한 경지를 이룬 것은 물론 '한복 입은 남자의 초상화'라는 그림으로 우리 역사와 이어진다. 서양미술사에 오른 '아르놀피니의 결혼'은 플랑드르파의 비조 얀 반 에이크가 그렸다. 현대에 와서는 르네 마그리트가 있다. 신세계백화점 리모델링 때 가림막에 쓰인 '겨울 비', 김영하 소설의 제목으로 차용된 '빛의 제국', 미셸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표지그림을 떠올리면 된다. 조각가 제롬 뒤케누아가 만든 마네킨피스(오줌싸개) 동상은 그 왜소함과 시시함을 알면서도 보지 않을 수 없다지 않은가.

또 있다. KTX에서 파는 와플은 미국과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 곳곳에서 재료를 가져와 한국에서 만들어도 이름은 '벨기에 와플'이었다. 벌거벗은 공작 부인의 사연을 담은 고디바 초콜릿의 출발이 그렇고, 호가든과 스텔라 등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맥주의 산지가 벨기에다. 김설진이라는 춤꾼이 활약했던 곳이 피핑톰이라는 벨기에 무용단이다. 유럽의 작은 나라가 생각보다 우리 곁에 바짝 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벨기에를 말하는 이유는 매력적인 강소국의 모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도 빈부격차와 지역감정, 테러 등 갈등의 요인이 많지만 그동안 괄목할 경제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이나, EU본부를 유치해 지역의 균형추 역할을 감당하는 점, 유럽 문화를 이끄는 역동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경제-외교-문화가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의미있는 물결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스위스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이다.

나는 여러 차례 유럽을 들락거리면서도 벨기에만 놓쳤다. 영·독·불의 일부로 여겼던 것 같다. 다시 유럽행 비행기를 탄다면 맨 먼저 겨울의 플랑드르로 갈 것이다. 거기서 안트베르펜의 오래된 골목길을 거닐다가 아르덴으로 넘어가 대성당의 뾰족탑이 보이는 들판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다. 그 여정은 공동체의 앞날을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는 순례의 길이 될 것이다.

손수호 객원논설위원 인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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