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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25 한국전쟁에도 멈추지 않은 구세군 활동

역사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삶이며 미래를 향해가는 하나님의 선교사역이다. 그러기에 역사는 한 민족, 한 국가에 한정 또는 고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민족의 아픔과 한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치유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1949년 구세군은 청소년 사역 등 다방면으로 성장을 이룩하며 여느 때보다 활기찬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 나라의 근간이 뒤흔들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구세군 사역 역시 위기와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구세군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전진을 거듭했다. 부득이하게 부산으로 본영을 옮겼음에도 자신의 맡은 바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한 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파죽지세로 3개월 만에 대구 부산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 지역을 장악했다. 전쟁으로 졸지에 임시 수도가 된 부산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으로 20만의 도시에서 갑자기 200만의 대도시가 됐다.

피난민 중에는 구세군인도 포함돼 있었다. 갑작스러운 피난으로 구세군인들 역시 뿔뿔이 흩어짐은 물론, 허버트 로드 사령관마저 피랍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후생학원 원생들은 제주도로 피난을 갔고 혜천원 소녀들은 대구로 보내졌다. 피난의 와중에 18명이나 되는 후생원 악대가 악기, 악보와 함께 납북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러나 구세군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구제소를 운영하며 피난민을 구제했다. 폐허가 된 곳에 많은 영문(교회)을 세웠고 충북 영동병원에서 기초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노력을 이어갔다. 서기장관 황종률 정령의 지휘 아래, 자선냄비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등 모금과 구호 활동을 계속했다. 그 결과 164만3900환을 모아 많은 동포를 도울 수 있었다.

구세군은 이처럼 본부를 부산으로 옮기는 등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피난민들의 고통과 슬픔, 가난을 어루만지고자 고군분투했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랑의 불을 지피기 위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 가운데서도 꿋꿋이 구세군 정신을 전파했던 선대 구세군인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그들이 배양한 구세군 정신을 더욱 확장시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 모두의 숙제가 아닐까 한다.

김규한 교수(구세군사관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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