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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외할아버지의 마당예술
비가 내리면 세상의 온갖 냄새들이 한꺼번에 올라온다. 비 오기 전 그 냄새들은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다. 비 오는 날 도시에서는 하수구 냄새라든가, 지하철에서 옆 사람의 옷에서 나는 땀 냄새가 MP3 볼륨을 키운 듯 커진다. 시골에서는 썩어 가는 두엄 냄새, 풀 냄새, 나무 냄새가 진해진다. 그동안 보이지 않게 존재했던 각종 미생물이 ‘나 여기 살아 있소’라고, 비가 올 때야 비로소 냄새로 외치는 것이다. 전에 살던 아파트는 공원 바로 옆이었는데 장마가 지기 전에 도시공원의 관리과에서는 자주 풀을 베었다. 비 오는 날까지 기다리지 않아...
입력:2017-07-09 17:35:01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초심 조심
문화센터 기타 교실에 등록을 했다. 학생은 열 명 정도. 첫 시간에 선생님은 몹시 긴장한 기색이었다. 자기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가르쳐야 하는데 이상하게 이렇게 됐다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리고 이름을 좀 익히겠다며 출석을 부르는데, 들고 있는 출석부가 파르르 떨리는 듯도 했다. 나는 잠시잠깐 수십 년 전 첫 강의를 하던 때로 되돌아갔다. 출석을 다 부르고 난 뒤 얼마나 눈앞이 깜깜했던가. 수업이 끝났습니다. 여러분, 집으로 돌아가세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소설이 이렇게 끝났던 것 같다.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 학교에서 마지...
입력:2017-07-06 18:1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축소지향형 쓰레기
면세품 인도장에서 물건을 찾고 보니 부피가 엄청났다. 내용물은 기능성 베개였는데 부피를 고려하지 않은 주문의 결과였다. 좀 과장하자면 그 박스는 내 키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다. 일본에 도착해서 미리 부친 캐리어를 찾으면 그 안에 이 박스를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타국에서 다시 상봉한 캐리어는 베개 박스보다 작았다. 결국 내용물만 꺼내고 박스는 버리기로 했다. 박스는 자기 몸체를 안아줄 만큼 좀 큰 용량의 쓰레기통을 필요로 했는데, 그 공항에는 우산 몇 개를 꽂아두면 다 찰 것 같은 쓰레기통만 보였다. 박스를 몇 번 접어서 표면적을 줄이려고 했...
입력:2017-07-04 18:00:01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비 오는 아침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는데, 빗소리를 들으며 깼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헷갈릴 땐, 자기 전에 생각하던 사람을 잠이 깼는데도 계속 생각나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빗소리만 들어도 이렇게 설레다니. 나는 비를 무척 그리워했구나. 얼마 전 미국 미네소타에 사는 친구가 SNS에 막내가 처음으로 혼자 우산을 쓰고 신나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올려주었다. 친구의 꽃무늬 우산. 망가지지도 않아 오래 갖고 있던 우산이라는데. 해맑은 아이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가 가지고 있던 꽃무늬 우산을 흔들며 웃는 모습을 보...
입력:2017-07-02 18:25:02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가이드 탓이야
베트남에 패키지여행을 다녀왔다. 가이드는 하루의 일정을 전날 저녁과 당일 아침에 알려준다. 가는 곳에 대해 설명하고, 목적지에 닿을 때쯤 한두 번 언급한다. 그러니 ‘고무나무’라는 말을 열 번 이상은 들었을 거다. 그런데 창가에 앉은 사람이 “어, 고무나무다!”라고 외치자 평소 목소리 큰 아저씨가 묻는다. “뽕나무요?” “아니, 고무나무요.” “곰나무요??” “아니, 고무나무요.” 비행기가 연착하면 누구 탓이죠? 가이드가 묻는다. 날씨 탓? 복잡한 공항 탓? 쇼핑에 정신 팔려 늦게 탄 손님 탓? 의견...
입력:2017-06-29 19:5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가짜 지진
나는 지금 대지진을 겪었던 도시에 와 있다. 새벽 2시부터 4시 사이, 불 밝힌 책상 앞에 앉아서 땅이 흔들린다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깨어 있었던 건 지진 때문이 아니라 단지 원고 마감 때문이었지만, 행간에 한 번씩 돌들을 떠올렸다. 지진으로 이 도시의 성이 무너졌을 때 퍼즐처럼 흩어진 돌들 말이다. 십만 개가 넘는다는데, 그 십만 개의 돌들이 원래 위치를 기억할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타국의 낯선 호텔, 새벽의 책상은 집중하기가 좋은 환경이라 어느 순간엔 정말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가끔 가짜 지진을 느낀다. 언젠가 다른 ...
입력:2017-06-27 18:30:01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한 숨의 소중함
작년만 해도 미세먼지는 나와 먼 이야기처럼 들었다. 미세먼지를 주의하라는 뉴스나 친구들의 걱정도 왠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이 아닐까 하고 흘려듣곤 했다. 내가 사는 곳은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서울의 위성도시이고, 산업시설, 에너지 시설로부터 많이 떨어져 있고, 교통량도 많은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올봄부터 ‘미세먼지 재앙’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느끼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작년부터 내가 사는 동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화력발전소가 가동되어 돌아가고 있다. 그 부근을 지날 때면 커다란 드럼 같은 발전소 위로 하얀 연기가 올...
입력:2017-06-25 18:10:02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또 다른 아기 새 이야기
지난주 새 이야기를 쓰면서 또 다른 아기 새를 떠올리게 되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인데. 10여년 전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원주 토지문화관에 들어가 있던 여름이었다. 당시 작가들은 저녁을 먹은 후 종종 연세대 원주캠퍼스 뒷산으로 산책을 가곤 했다. 30∼40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한적한 코스였다. 어느 날 아기 새가 내 눈에 띄었다. 눈이나 간신히 떴을까, 거의 벌거숭이인 진짜 아기 새였다. 녀석은 산책길 옆 도랑처럼 길게 파인 골 안에 엎드려 있었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파들파들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주변에 그럴 만한 나무도 없는데, ...
입력:2017-06-22 17:30:01
[살며 사랑하며-윤고은] 룰렛의 결과물
타국의 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아내의 선물을 사기 위해 고심하는 남편들을 보게 된다. 주로 탑승구 앞 작은 면세구역에서. 나도 화장품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어떤 분의 선택에 동원된 적이 있다. 그 남자는 아내 선물용으로 뭐가 좋을지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내가 자신보다는 더 나을 거로 생각해서 물어본 것이겠지만, 나는 그 순간부터 결정 장애를 겪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에센스와 크림 세트를 권했는데 그분은 눈치챘을까. 내가 확신을 가지고 “이거 좋아요” 했던 건 결국 룰렛의 결과물 같은 거였음을. 곧 그 일행이 다가와 모...
입력:2017-06-20 17:30:01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네버랜드의 돌봄 노동
지난 일주일 내내 걸리는 단어가 있었는데 ‘잠자리 보살핌’이었다. 사퇴한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쓴 책에 나온다고 해서 찾아보니, 육아 관련 단어가 아니고 ‘남편에 대한 잠자리 보살핌’이라는 말이어서 충격적이었다. 왜 아내인 여성이 어린이가 아닌 성인 남성인 남편까지 잠자리 보살핌을 해야 할까. 산업혁명으로 부유했던 100년 전 런던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피터 팬과 웬디. 피터 팬이 웬디의 집까지 날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네버랜드의 ‘집 없는 소년’들에게 잠들기 전 웬디가 동생들에게 읽어주는 동화 속 이야기를...
입력:2017-06-18 19:20:01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엄마의 종이컵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오이김치와 얼갈이 열무김치 담가 놨으니 가져가라고. 내가 가지러 가면 엄마는 집에 없을 거라 하셨다. “어디 가시는데?” “우리 엄마한테!” 외할머니는 3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하셨는데, 그때가 구순이었다. 할머니는 살만큼 살았으니 땅으로 돌아가더라도 암 덩어리는 떼고 들어가고 싶다고 하셨다. 고령이라 암세포도 더디 컸다. 통증보다 수술과 항암치료가 더 무리일거라 해서 7년을 키운 종양이었다. 종양은 깔끔하게 제거되었고, 다른 부위 전이는 없었다. 할머니가 처음 암센터에 오셨을 때 조직검사를 하느...
입력:2017-05-12 14:02:54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가슴에 묻은 아이들
우리 집안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가 몇 있다. 25년 전에 큰집 큰언니의 다섯 살 된 큰아이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 집안에선 금기였다. 누구의 어떠한 말로도 언니와 형부를 위로해줄 수 없었다. 그들을 위로해줄 자격이 되는 사람은 둘째 큰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 다른 자식이 있었는데 홍역으로 그 아이를 잃은 우리 할머니, 그리고 열아홉 살 아들을 오토바이 사고로 잃었던 서울 당고모뿐이다. 그 외의 가족들은 그저 기대고 싶을 때 안아주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손만 잡아줄 수 있었을 뿐. 사촌언니의, 당고모님의, 그리고 ...
입력:2017-04-28 16:02:53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딸기를 먹다가
퇴근하는 남편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딸기를 세 팩이나 사왔다. 웬 딸기를 이렇게 많이 샀느냐고 묻자 세 팩을 묶어 할인해서 팔기에 사왔다는 알뜰주부 같은 대답. 이제 곧 하우스 딸기의 끝물인 것이다. 딸기를 씻으려고 보니 윗줄은 싱싱했었는데 아랫줄은 상한 것이 많았다. 상한 것을 도려내 다듬어 접시에 딸기를 올려 본다. 상한 딸기를 다듬고 나면 손에서 한동안 상큼한 딸기 향이 난다. 딸기 향을 맡으면 자동으로 어릴 적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다. 어릴 때 우리 집도 딸기 밭이 있었다. 수확해서 팔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고, 부모님은 사남매 먹일 정도로만 하셨...
입력:2017-04-14 17:46:54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봄날은 간다
4월이다. 곳곳에 꽃소식도 들리곤 하지만, 북쪽에 위치한 우리 동네엔 아직 한 송이 꽃도 피지 않았다. 봄이라는데 봄 같지 않은 뉴스들이 넘쳐나고, 내가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다들 지쳐 있다. 봄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가버린 기분. 하늘은 미세먼지로 뿌옇고.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어릴 때 살던 동네에는 거의 모든 집 앞에 작은 텃밭이 있었다. 그 텃밭들엔 상추, 깻잎, 쑥갓, 풋고추와 오이, 가지. 그때그때 먹을 반찬으로 만들 푸성귀들을 키우곤 했다. 겨울이면 그 텃밭 옆에 연탄재를 쌓아 내놓던 집도 있었고. 아이들은 연탄재를 굴려 눈밭이 ...
입력:2017-04-12 17:02:58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
얼마 전, 2002년 민주당 경선 당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연설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노무현 지지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 연설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그 연설을 이제야 들으며 나는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머니가 남긴 가훈이라며 하시는 말씀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권력에 맞서 싸우며 한 번도 권력을 쟁취하지 못했던,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야만 했던 이들에게 돌아가신 선조들은 이런 말...
입력:2017-04-10 15:13:14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학교급식의 내공
올해로 중 2가 될 우리 아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일명 ‘학교 밖 청소년’이다. 물론 작년 12월까지는 학교에 다녔다. 그 학교는 초등 5학년 과정부터 다니게 된 대안학교였다. 작년 가을부터,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그때부터 그 학교에서도 학내 분규가 터졌다. 학교 교장과 교사 간의 갈등이 알려져 큰 파란이 일어 많은 이들이 상처를 안고 학교를 떠났고, 아직 남아 있는 이들 또한 상처를 봉합한 채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는 그 상처를 감당하며 거기 있을 수 없어 학교를 나온 경우였다. 그 후 우리 가족의 일상은 180도 달라...
입력:2017-03-28 14:15:46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거스를 수 없는 상식
여태 살면서 이렇게 심장이 조여드는 생방송은 처음이었다. 사상 유례 없는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방송을 보면서, 그 22분 동안 느꼈던 심장 두근거림과 간담 서늘함은 사십 여년 넘는 내 개인 생애를 돌아봐도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 그 시각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든 TV를 켜놓거나 인터넷 방송을 연결해 놓거나 많은 이들이 그 중요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생방송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당연한 결과를 왜 이렇게 가슴 졸이며 기다려야 했는지 억울한 사람도 많았겠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라며 분노하고 ...
입력:2017-03-30 16:55:06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호두 투병기(2)
허리 디스크 진단을 받은 26개월 된 강아지 호두를 보호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수술을 시키기 위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가든지, 비스테로이드계 진통제를 처방받다가 약이 안 들으면 강력한 스테로이드계 진통제로 바꿔 약을 먹이는 것. 나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동물 MRI는 의료보험 적용도 안 되어 비용이 많이 들뿐더러 왜 그런 검사를 받아야 하는지 개에게는 말로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없으므로 전신마취를 한 후 MRI 관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청소년이 된 우리 아이 유아 시절. 약을 먹여도 감기...
입력:2017-03-23 09:42:52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호두 투병기(1)
26개월 된 토이푸들을 키우고 있다. 개의 이름은 호두다. 털빛이 호두색이고 동글동글 호두처럼 귀여운 아이다. 99%의 대한민국 강아지들이 그렇듯, ‘강아지공장’ 출신이다. 호두를 키우게 된 사연은 너무 길어 생략한다. 잘 놀던 호두가 얼마 전부터 놀지도 않고, 방석에만 앉아 있는데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아랫배는 돌처럼 딱딱했다. 혹시 감기에 걸린 걸까? 배탈이 났나? 사료 사러갔다가 사은품으로 받은 훈제오리물렁뼈를 간식으로 준 것이 잘못됐나? 모르는 사이 양파껍질이나 초콜릿 조각이라도 먹었나? ‘호두야∼’ 이름을 부르면 덜덜 떨며, ...
입력:2017-03-23 09:4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