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5편>] “목회자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갱신의 ‘별세신앙’


이중표 목사


이중표 목사가 담관암 말기 진단을 받은 병약한 몸으로 성도의 발을 씻기고 있다. 별세목회연구원 제공
 
 
별세목회연구원에서 개최한 목회자 세미나 모습으로 평균 3000명이 참여했다. 별세목회연구원 제공


이 목사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읽던 성경. 창세기 27장 1∼3절에 밑줄이 쳐있다.
빨강색 볼펜이 성경에 꽂힌 채 유품으로 보관돼 있다.   별세목회연구원 제공
 



종교개혁은 교황무류설(敎皇無謬說)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교황이 내린 결정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오류가 없다는 가톨릭교회의 반성경적 주장을 부정한 것이 종교개혁이다. 이처럼 교황의 전횡을 거부하고 나선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서 목회자가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오늘날 교회의 위기 중 하나는 ‘목회자가 너무 살아 있다’는 현상일 것이다. 한국교회는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이중표 목사(1938∼2005)의 별세 선언을 다시 들어야 한다.
 
생의 최저점에서 깨달은 ‘별세의 신앙’
 
복음 전선에 부름 받은 종들이 그 사명의 길에서 체험하는 전환점은 매우 극적일 때가 있다. 다메섹 도상의 사울이나 종교개혁자 루터가 세상길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선 순간이 그랬듯이 거지(巨智) 이중표 목사에게도 그 날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그의 목회 반곡점은 1969년 신학교 졸업과 함께 시작한 농촌목회를 마감하고 1975년 서울로 올라와 도시목회를 시작하면서 찾아왔다.
 
도시목회는 처음이었지만 영혼 구원에 대한 뜨거운 헌신으로 교회는 짧은 시간에 크게 부흥했다. 그러나 이 목사의 목회 방침에 반발한 일부 성도들로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설교 도중 성도들에게 끌려 내려오는 수모를 겪다가 끝내 당회권을 박탈당한 채 부임 2년 만에 빈손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엄동설한에 갈 곳도 없는 처지가 된 목회자는 실로 감내하기 어려운 절망에 빠지게 된다. 후일 이 목사는 “그때가 하나님이 예정하신 인생의 최저점이었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시간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이었다. 장기간 금식기도를 하면서 ‘목회자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때 받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은 이중표 목사의 신앙과 목회의 근거가 됐다. 이름 하여 ‘별세신앙’이자 ‘별세목회’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신앙이다.
 
별세의 깨달음과 함께 그는 새로운 목회의 비전을 갖게 됐는데, 그것은 창세기 49장 22절 말씀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그것이 1977년 한신교회의 출발이었고 그의 별세목회가 지역교회를 넘어 한국교회와 해외로까지 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온 시작이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배우라” 주님의 음성
 
이 목사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별세신앙은 훨씬 이전에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1938년 공교롭게도 민족의 국치일과 날짜가 같은 8월 29일 서해안 변산반도 끝자락 전북 부안군 하서면 신지리에서 태어난 이 목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를 마치기까지 한번도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 적이 없을 만큼 극한의 가난을 경험했다. 영양실조와 결핵으로 사경을 헤매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 따라 교회를 나갔다가 즉각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
 
이때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신유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한국신학대에 들어갔다. 그는 신학교에서 분명한 사명과 비전을 갖게 됐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조국 복음화의 사명이며, 예수님에게서 배운 ‘별세’라는 신비한 목회 비전이다.
 
그는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된다. “종아,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느냐.” “신학입니다.” “신학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을 배우느냐.” “교수님입니다.” “신학은 교수에게 배우고 하나님은 나에게 배워라.” “어떻게 배웁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님이 친히 하신 마태복음 11장 29절 말씀을 듣고 그는 신학이란 인간의 학문을 넘어 하나님을 배우는 일이며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예수님처럼 죽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평소 “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별로 없고 예수님에게서 배웠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랬기에 그는 지병이 깊었던 2003년 이론중심의 신학교육을 성경중심의 실천적 커리큘럼으로 개선하기 위해 필자가 추진한 범교단 신학대학연합의 ‘신학교육개선공동연구’에 희망을 걸고 후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교회 목회자의 실천 과제 ‘별세목회’
 
이 목사의 별세목회가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는 기복주의 신앙을 한창 가르칠 때, 그는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옛 사람은 죽고 예수와 함께 새 사람으로 사는 진정한 성도가 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가 강조한 가르침은 죽음 이후로 유보된 천국의 삶을 이 땅으로 끌어내리라는 것이다. 죽어서 별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별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별세신앙으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이르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세상을 살리는 창조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가르쳤다.
 
별세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실천하신 지고(至高)의 진리이므로 모든 교회가 실천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국 신학계의 원로 이종성 박사는 “한 목회자가 내세지향적인 신앙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이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을 동시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고 주장한 것은 성서적 기독교 실존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별세목회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별세신앙은 삶과 분리될 수 없으며 동시에 인성과 유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목사는 강단의 메시지를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고자 했다. 주린 자를 만나면 사재를 털어주었고, 두 벌 이불은 이웃과 나누어 덮었으며 벗은 자를 보면 입던 옷을 벗어주었다. 모든 외부 사례비는 교회에 바쳤으며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 이 목사의 별세선언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에 큰 울림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가 실천한 별세의 삶 때문이리라.
 
이 목사는 오랜 지병으로 네 번의 대수술을 받고 그의 고백처럼 ‘별세4수(別世四修)’ 끝에 2005년 7월 7일 6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성자처럼 살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었던 한 소년의 꿈이 오랜 투병 중에 이루어졌는지 모른다. 당시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서는 이례적으로 이 목사의 죽음에 애도의 뜻을 표했었다.
 
이 목사가 1987년 시작해 2005년까지 지속한 별세목회연구원의 전국목회자세미나는 분당 한신교회 이윤재 목사에 의해 체계화돼 30년을 맞이했다.
 
이윤재 목사는 “위기의 시대 한국교회 갱신을 위해 예수의 삶을 본받아 산 이중표 목사의 별세목회가 널리 확산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글 김성영 목사 (전 성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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